기고 [기고글] 값싼 은혜의 복음 - 박영돈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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값싼 은혜의 복음
선지동산 42호 게재 / 성화의 복음(2) / 박영돈 교수
성화와 단절된 칭의
은혜만을 지나치게 강조하는 가르침이 한국교회에 도덕적 해이를 불러 왔다는 말을 자주 듣는다. 그러나 좀 더 엄밀히 말하자면, 한국교회의 윤리적 실패는 은혜만을 전했기 때문이라기보다 ‘은혜를 잘못 전했기 때문’이라고 보아야 한다. 본회퍼(Bonhoeffer)의 말로 표현하자면, 값진 은혜를 “값싼 은혜”로 잘못 전했기 때문이다.
그러면 한국교회에 무율법적인 혼란을 초래한 값싼 은혜의 복음은 어떤 것인가? 가장 보편적인 것은 아마도 칭의와 성화를 분리하여 구원은 칭의에만 근거하며 성화와는 무관한 것으로 보는 견해일 것이다. 이런 가르침에 의하면 성화는 구원의 필수적인 요소가 아니라 부수적인 것이며 기껏해야 천국에서의 상급과 관련될 뿐이다. 그래서 삶과 인격에 아무런 실제적인 변화가 없어도 칭의에 근거해서만 구원을 얻는다.
그러나 이러한 가르침은 비성경적일 뿐 아니라 종교개혁자들의 구원론과도 거리가 멀다. 캘빈은 칭의와 성화를 구분하면서도 그 둘 사이의 긴밀한 연결성을 강조하였다. 그의 가르침에 의하면 칭의와 성화는 항상 함께 가는 것이며, 실제로는 결코 분리될 수 없다. 다만 논리적으로 구별될 뿐이다. 만약 칭의가 참된 것이라면 지체 없이 그리고 필연적으로 성화가 뒤따라오기 마련이다. 그러므로 의롭다 함을 받은 자는 그와 동시에 거룩하게 된다. “그리스도께서는 거룩하게 하시지 않고서는 그 누구도 의롭다하지 않으신다.”(John Calvin, Institutes, 3. 16. 1). 이와 같이 칭의와 성화는 영원한 끈으로 하나로 엮어져 있다. 그러나 이 둘을 논리적으로 구별할 필요가 있는 것은, 로마 가톨릭과 같이 칭의와 성화를 혼합하여 칭의가 어느 정도 신자의 실제적인 거룩함(성화)에 근거한 것으로 보게 되면 구원의 확신이 심각하게 위협받을 뿐 아니라 하나님의 무조건적 구속의 사랑과 은혜의 성격이 흐려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캘빈은 로마 가톨릭의 오류에 대응하여 칭의와 성화를 날카롭게 구! 별하는 동시에 성화의 중요성을 약화시키는 무율법주의 위험에 대비하여 칭의와 성화의 연결성을 강조한다.
이러한 캘빈의 가르침은 근본적으로 로마서에 제시된 바울의 구원론과 맥을 같이한다. 바울은 유대 율법주의에 맞서서는 성화와 구별된 칭의를 강조하였고(롬 3-5장), 무율법주의의 반론을 배격하기 위해서는 칭의와 연결된 성화(롬 6장)를 논하였다. 이와 같이 칭의와 성화의 구별성과 연결성을 균형 있게 적용함으로써 율법주의와 무율법주의 양극단을 효과적으로 물리치는 전략적인 논증이 성경에 근거한 개혁주의 구원론의 핵심을 이루고 있다. 이 귀한 신앙의 유산을 물려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개혁주의를 표방하는 교회의 강단에서조차 이러한 가르침과 동떨어진 값싼 은혜의 복음에 가까운 메시지가 전파되고 있다는 것은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오직 믿음”에 대한 오해
하나님의 진귀한 은혜를 헐값의 은혜로 변질시켜 버리는 또 다른 요인은 믿음과 행함의 유기적 관계에 대한 이해의 부족이다. 종교개혁의 오직 믿음(sola fide)의 교리는 칭의에 있어서 행함의 역할을 배제한다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벨카우어(G. C. Berkouwer)가 잘 지적했듯이, “오직”이라 표현은 믿음만이 참된 선행의 유일한 가능성이라는 점을 강조한다(G. C. Berkouwer, Faith and Sanctification(Grand Rapids: Eerdmans, 1977), p. 38). 오직 믿음만이 하나님의 은혜를 가로 막는 육신적 행위를 밀어내고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가 우리 안에 흘러들어오게 하는 통로가 된다. 오직 믿음만이 성령이 우리 안에 내주하며 역사하는 채널이 된다(갈3:2-5). 더불어 오직 믿음만이 성령을 통하여 부활하신 그리스도가 우리 안에 사시고 행하시게 하는 비결이다. 그러므로 오직 믿음만이 우리 안에 그리스도의 형상을 이루어가는 성령의 열매를 산출할 수 있다. 이러한 관점에서 오직 믿음이란 말은 육신의 열심과 교만에서 비롯된 율법적 행위를 배격한다는 의미뿐만 아니라 믿음만이 성령의 은혜로 인한 참된 선행을 가능케 하는 유일한 길이라는 의미를 강조한 것이다.
따라서 \'오직 믿음\'의 교리를 행위의 중요성을 조금이라도 약화시키는 견해로 이해하는 것은 종교개혁의 가르침을 근본적으로 곡해한 것이다. 루터와 캘빈은 의롭다함을 받은 믿음은 반드시 선행의 열매를 맺는다는 것을 누누이 역설하였다. 그들은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받은 이들은 자원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의 뜻을 기쁘게 따르게 된다고 하였다. 이러한 견해는 제대로 순종하지 못해도 믿기만 하면 구원받는다는 신자들의 보편적인 생각과 아주 다르다. 믿음은 순종의 대용물이 아니라 오히려 온전한 순종을 가능케 하는 능력이다. 믿음은 결국 바울의 말과 같이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이다(갈5:6). 따라서 믿음과 행함, 믿음과 회개, 믿음과 순종, 믿음과 사랑이 성령의 사역 안에서 긴밀히 연결되어 있다는 통합된 시각에서 믿음의 교리를 가르쳐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믿음은 그 참된 의미를 상실한 채 열매를 산출하지 못하는 병들거나 죽은 믿음으로 전락해 버린다. (다음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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