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기고글] 칭의는 복음, 성화는 율법? - 박영돈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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칭의는 복음, 성화는 율법?
선지동산 44호 게재 / 성화의 복음(4) / 박영돈 교수
‘구원받기는 쉽지만 거룩하게 살기는 참 어렵다.’ 이것이 아마 대부분의 개신교 신자들이 신앙생활하면서 맛보는 당혹스러움일 것이다. 칭의라는 희소식에 뒤이어 밀려오는 성화의 부담스러운 요구들이 구원의 감격을 금세 신앙생활의 고달픔과 신음으로 바꾸어 버린다. 언젠가 신앙생활을 시작한지 얼마 안 된 교인이 입가에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이렇게 말했던 것이 기억난다. “개신교는 오직 믿기만 하면 구원받는다고 가르치고는 믿은 후에는 엄청나게 많은 의무와 행함을 요구하네요.” 그분은 신앙의 연륜이 짧아서 그리스도 안에서 풍성한 생명을 누리게 하는 은혜를 미처 깨닫지 못했던 것 같다. 이 같은 푸념은 분명 복음에 대한 이해의 부족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러나 개신교 강단에서 전파되는 성화론이 교인들 안에 이러한 그릇된 인식을 심어주기도 한다. 칭의 교리는 교인들에게 기쁜 소식으로 들리지만 성화에 대한 권면은 복음과는 거리가 먼 율법적인 메시지로 들릴 때가 많다. 이렇게 개신교 안에 일관된 성화론의 부재로 말미암아 많은 교인들이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받은 후 어떻게 역동적인 성화의 삶을 살 수 있는가에 대해 올바로 이해하지 못한 채 방종주의나 율법주의로 치우치고 있다.
헛된 성화의 노력을 그치라
필립 얀시(Philip Yancey)는 그의 베스트셀러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에서 개신교 안에 만연해 있는 고질적인 병폐인 무율법주의적 혼란보다 율법주의가 더 교묘하고 무섭게 은혜를 위협하는 요소라는 것을 탁월한 대중적인 필치로 아주 설득력 있게 밝혀주었다. 우리 강단에 성화의 복음을 회복하는 길은 먼저 개신교 안에 누룩처럼 은밀히 번져가는 새로운 율법주의를 경계하는 것이다.
율법주의적 성향은 신자 안에 항상 도사리고 있으며, 구원받는 단계에서 뿐만 아니라 그 후 성화과정에서도 나타난다. 그리하여 신자가 칭의의 은혜뿐 아니라 성화의 은혜까지 받아들이기 힘들게 만든다. 프린스턴 신학자였던 아키발드 알렉산더(Archibald Alexander)는 하나님이 아무런 조건 없이 전적인 은혜로 인간의 모든 죄를 용서하고 의롭다고 하신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것은 아마 “이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일 가운데 하나”일 것이라고 했다. 자신의 의로움을 고집스럽게 의존하는 교만한 성향 때문에 인간이 칭의의 은혜를 확신하고 누리기가 그다지도 힘든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문제는 단지 칭의에만 국한되지 않고 성화의 과정에서도 지속된다. 씨맨즈(David A. Seamands)가 지적했듯이, 신앙생활에서 “우리가 가장 포기하기가 힘든 것은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를 얻어 내기 위해서 뭔가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다.” 많은 교인들은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은혜로 의롭다함을 받아놓고는 이제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지속적으로 누리는 것은 자신들이 얼마나 신앙생활을 잘 하는가에 달려 있다는 생각에 사로잡힌다. 그들은 거의 무의식적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인간의 경건에 어느 정도 근거하는 조건부 사랑의 형태로 바꾸어 버리고는 그 사랑을 사기 위해 무엇인가 공헌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쫓기며 경건의 노력을 기울인다.
그러나 이러한 율법주의적 열심은 성화를 다이내믹하게 진행하는 성령의 역사에 오히려 거침돌이 될 수 있다. 우리 마음속에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이 스며들지 못하게 하는 딱딱한 차단막을 형성한다. 그리하여 우리가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사랑 속에 살고 있으면서도 그 사랑을 쉽게 받아들이며 누리지 못하게 한다.
칭의에서와 마찬가지로 성화의 과정에서도 우리에게 가장 힘든 일은 하나님의 은혜보다 인간의 힘을 의지해 살아가려는 헛된 율법적인 수고를 그치는 것이다. 하나님의 은혜만 계속 신세지며 사는 것은 자기 의를 숭배하는 인간의 교만한 자존심을 심히 상하게 한다. 은혜만을 의존하는 ‘오직 믿음’의 원리는 너무도 단순하고 쉬운 성화의 길로 보이기에 우리 안의 일종의 직관이 이를 거부한다. 그래서 심슨(A.B. Simpson)은 신자들에게 “가장 큰 위험은 그들이 행하지 못하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행하려 하는데 있다”고 했다.
“나의 노력을 그치고 하나님이 일하게 하라”는 슬로건은 바로 이러한 율법적 노력의 포기를 요구하는 구호이다. 즉 하나님의 일하심을 오히려 방해하는 육신의 행함을 그치고 하나님께서 자유롭게 행하실 수 있도록 길을 열어드려라, 다시 말하면, 그를 전폭적으로 의존하는 믿음의 삶으로 돌이키라는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다.
성화와 ‘오직 믿음(sola fide)’
이같이 하나님의 은혜만을 의지하는 ‘오직 믿음’의 비결은 은혜의 통로를 가로막고 있는 율법적 행함을 몰아냄으로써 하나님의 풍성한 은혜가 밀려들어오는 채널을 활짝 열어 놓는데 있다. ‘자기의’의 성곽으로 둘러싸인 인간의 마지막 보루를 허물어뜨림으로써 우리를 자신 안에 더 이상 의지할 것이 없는 철저히 연약한 자로서 하나님만을 바라보는 자리에 서게 한다. 이렇게 우리가 자신을 의지하는 삶의 마지막에 이르렀을 때, 하나님이 우리 안에서 강력하게 역사하기 시작한다. 그래서 우리는 약함 중에 강해지는 것이다. 한 영성가의 말처럼, 이런 연약함의 영성은 ”하나님의 능력의 진정한 통로가 되도록 우리를 열어 주시는 하나님께 전적으로 그리고 무조건적으로 의지하는” 영성이다.
우리의 성화의 메시지는 무엇보다도 먼저 신자들을 이러한 믿음으로 인도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개신교 강단에서 가장 빈번하게 나타나는 성화론적 오류는 성화와 ‘오직 믿음’과의 긴밀한 관계를 바르게 이해하고 가르치지 못하는 것이다. 칭의를 논할 때는 믿음의 역할을 강조하지만, 성화를 다룰 때는 믿음보다는 행함을 더 강조하기 십상이다. 대체로 ‘오직 믿음’의 원리는 칭의에만 적용되는 것으로 생각한다. 성화 과정에 들어서면 신자는 이 원리를 떠나 신인 협동체제의 삶으로 전환하는 것으로 이해한다. 이러한 일반적인 오해가 율법주의가 잠입할 틈새를 열어준다.
그러나 칭의 뿐 아니라 성화의 전 과정은 오직 믿음의 바탕 위에서 진행된다. 우리는 오직 믿음으로 의롭게 될 뿐 아니라, 오직 믿음으로 거룩하게 된다. 이 말은 개신교 신자들에게 생소하게 들릴지 모른다. 오직 믿음으로 거룩하게 된다면 성화를 위한 인간의 노력과 행함이 필요 없다는 말인가? 물론 그렇지 않다. 이 말은 성화과정에서 인간의 행함이 ‘오직 믿음’이라는 채널을 통해서 주어지는 하나님의 은혜로만 가능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여기서 ‘오직’은 인간의 역할을 배제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진정으로 가능하게 하는 근거를 밝히고 있다. 이는 오직 십자가만이 칭의의 공로인 것같이 또한 성화의 근거임을 주목하게 한다. 우리는 오직 십자가를 바라보는 믿음으로 죄사함과 의롭다함을 얻은 것 같이, 오직 십자가의 효력을 의지하는 믿음으로 성화를 이루어간다. 그것은 십자가에서부터 죄를 이기는 능력, 거룩하게 사는 효력이 흘러나오기 때문이다. (다음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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