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기고글] 예언자인가 점쟁이인가? - 박영돈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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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언자인가 점쟁이인가?
얼마 전 텔레비전의 한 프로에 오왕근이라는 청년 점술가가 출연하였다. 그는 같이 출연했던 연예인들의 과거와 현재의 문제를 쪽지게처럼 잘 집어내고 그들의 미래를 예언했다. 모두 그의 신통력에 놀라 입을 다물지 못했다. 그는 어떤 이를 보면 그의 운이 바닥을 치고 있고 재물이 흩어지며 사람들도 그를 배신하고 떠나는 것이 보인다고 했다. 오왕근씨는 17살 때부터 이런 신기가 나타났는데, 하루는 학교에서 한 선생님을 보니 그가 큰 교통사고를 당하는 것이 보였다고 한다. 자신도 그런 기이한 체험은 처음이고 그것이 미래를 예시하는 것인지 확실치 않아 말해주지 못했는데 그 선생님이 자신이 본대로 성수대교에서 대형 사고를 당했다는 것이다. 그 후부터 그는 개인의 운명뿐 아니라 이 사회의 정치, 경제의 미래까지 예측할 수 있게 되었다고 말한다. 그는 주식이 언제 오르고 내릴지, 앞으로 어떤 사업을 해야 할지, 어디에 투자해야할지를 예언한다.
필자는 그를 보면서 요즘 한국교회에서 활개치고 있는 자칭 예언자들이 얼마나 이 점술가와 흡사한지를 새삼 발견케 되었다. 어떤 예언자라는 이들은 기독교라는 탈을 쓴 점쟁이와 다름없다. 자녀들이 어떤 학교에 가야하고 무슨 사업을 해야 하며 심지어 어디로 이사해야 하는지 까지 예언한다. 그러니 중요한 결정을 해야 할 때나 미래가 불안하고 궁금할 때 점쟁이를 찾아가듯이 이런 예언자들을 찾아다니는 교인들이 꽤 많다. 필자와 상담했던 한 아가씨는 예언하는 신통력이 있다는 여전도사가 자신이 사귀고 있는 청년이 결혼할 대상이 아니니 헤어져야 한다고 예언했다는 것이다. 평소 이 여전도사의 예언을 거의 절대적으로 믿고 따르는 그녀의 어머니가 한사코 그 청년과 결별할 것을 종용하니 어찌해야 좋을지 몰라 난감하다고 했다. 그 청년이 불신자도 아니고 그리스도인이 혼인해서는 안 될 만한 부적격 사유가 전혀 없는데도 그는 결혼대상에서 완전히 제외된 것이다. 단순히 미래를 미리 내다보는 점괘가 그렇게 나왔기 때문이다. 과연 이러한 예언이 성령으로부터 온 것일까?
성경에서 이런 유의 예언은 전혀 찾아 볼 수 없다. 하나님은 그런 식으로 우리의 미래를 알려주시지 않는다. 하나님은 우리가 미래를 모르게 하셨다. 그래서 내일 일과 염려는 다 주께 맡기고 오늘 하루를 주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기 원하신다. “내일 일은 난 몰라요 하루하루 살아요” 라는 찬송가 가사처럼 말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렇게 하나님을 신뢰하는 모험보다는 우리의 앞날을 미리 아는 안전을 원한다. 이것은 피조물의 한계를 벗어나 미래를 마음대로 컨트롤할 수 있도록 우리 휘하에 두고 싶은 교만의 발로이며 하나님의 신실하심과 선하심을 온전히 신뢰하지 못하는 불신의 소치이다.
미래를 미리 안다면 하나님이 원하시는 믿음의 삶은 불가능해진다. 그와 더불어 믿음의 삶 속에서 누리는 무한한 선택의 자유를 누리지 못하며 그 선택의 책임을 다하는 인간으로 성숙할 기회를 박탈당한다. 만약 우리가 원하는 대로 미래를 훤히 내다본다면, 우리는 이미 정해져 어찌 할 수 없는 냉혹한 운명의 꼭두각시가 될 것이다. 운명의 주사위는 이미 던져졌으니 이제 달리 선택할 자유는 전혀 없다. 우리의 미래가 탄탄대로임을 안다면 우리는 안일과 나태에 빠질 것이며, 반대로 고통스럽고 암울한 미래가 보인다면 자포자기 한 채 그 불운한 말로를 기다리며 공포와 불안에 떠는 삶을 살 것이다. 알려진 미래는 더 이상 우리의 꿈과 비전을 펼칠 수 있는 자유의 전당이 아니라 우리의 모든 꿈을 앗아가고 우리를 가두는 감옥이 된다. 미래가 우리에게 알려질 때 미래는 모든 희망과 믿음과 가능성에 대해 닫힌 냉혹한 운명이 된다. 그러면 우리는 더 이상 우리의 미래를 만들어가는 자유로운 개척자가 아니라 그 미래에 의해 철저히 억압당하는 비참한 노예로 전락한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미래를 알지 못하게 하심으로 우리의 자유를 보장해주시고 믿음과 소망의 삶이 가능케 하셨다. 희망찬 미래를 바라보며 사랑의 수고와 책임을 다하는 인간성숙의 기회를 제공하셨다. 이렇게 미래를 우리 앞에 열린 상태로 놔두심으로 하나님의 뜻에 맞춘 우리의 비전과 갈망에 의해 우리의 미래를 빚어가게 하신 것이다. 미지의 미래가 우리 앞에 하얀 백지처럼 펼쳐 있기에 우리는 그 화폭 위에 우리의 비전과 꿈의 나래를 한껏 펼쳐나간다. 하나님께서는 미래를 우리에게 숨기심으로 장래에 예비해 두신 풍성한 은혜의 깜짝쇼를 즐기게 하신 것이다.
미래가 우리에게 드러나지 않았기에 우리 앞에는 놀라운 자유의 길이 열려있다. 우리가 결혼할 대상은 무한히 많다. 이 사람과 결혼할 수도 있고 저 사람과 결혼할 수도 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어떤 사람과 결혼하도록 운명론적으로 점지해 두셨다고 생각하기에 그 사람을 꼭 찾아내야 한다는 일종의 강박에 사로잡힌다. 그래서 금지된 미래를 엿보려는 강한 충동을 느낀다. 기도를 통해 계시를 받거나 예언자들의 신통한 예측을 듣기 원한다.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예정하셨다. 그러나 그 예정하신 것을 우리가 미리 다 알지 못하도록 예정하셨다. 마치 우리의 자유로운 선택에 의해 미래가 결정되기라도 하듯이 우리의 자유를 전혀 침해하지 않는 신비로운 방법으로 우리의 미래를 예정하셨다. 그러므로 우리가 현재 하나님의 뜻 가운데 거하며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책임 있게 우리의 자유를 활용한다면 우리가 어떤 선택을 할지라도 그것이 하나님의 뜻과 부합하는 것이 될 수 있다.
두 사람의 결혼대상이 있는데 아무리 생각해보아도 둘 다 좋은 상대이고 호감이 간다고 하자. 실제 이런 상황은 드물겠지만 한 번 가정을 해본다면 당신은 어떻게 할 것인가? 둘 중에 한 사람은 분명 하나님이 정해둔 나의 배필이 아니니 그 사람을 어떻게 해서든 속출해내야 할까? 아무리 기도를 해도 어느 쪽을 택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인지 알 수 없을 때 어떻게 해야 할까? 예언자를 찾아가야 하나? 열심히 기도하고 최대한 지혜를 모아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가늠해보는 노력이 물론 필요하다. 성령님께서 당신의 마음과 판단을 인도하여 점차 어느 한 쪽에게 더 끌리게 하실 수도 있다. 그러나 그런 것이 없는 경우는 어떻게 해야 하나? 아무리 애써 봐도 확실한 판단이 서지 않을 때는 두 사람 중 누구를 택하든 그것이 당신을 향한 하나님의 뜻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하나님이 정해두신 사람을 찾아내야 한다는 강박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당신의 미래를 펼쳐갈 수 있는 지혜이다.
성경에 분명히 계시된 하나님의 뜻에는 선택의 여지가 전혀 없다. 우리가 거룩하게 살며 그리스도의 형상을 본받는 것이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기쁘신 뜻이다. 여기에는 전혀 유도리가 없다. 그러나 성경에 계시되지 않은 하나님의 뜻, 예를 들어 어떤 직장을 택하며 누구와 결혼하며 자녀를 몇을 나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많은 선택의 자유가 주어졌다. 하나님의 뜻이 꼭 이 직장을 선택하는 것이라고 못박아버릴 수 없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이 길을 택할 수도 있고 저 길을 택할 수 있도록 우리의 미래에 대해 놀라울 정도로 융통성을 허용하신다. 어떤 길을 택하든 하나님을 중심한 삶의 목적과 원리 가운데 내린 선택이라면 그것이 바로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선하신 뜻이 될 수 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정해진 미래로 우리를 옴짝달싹하지 못하게 묶어두지 않으시고 미래를 열어두셨다. 당신은 A와 결혼할 수도 있고 B와 결혼할 수도 있다. 둘 다 하나님이 금하신 결혼대상이 아니라면 누구와 결혼하든 하나님께서 그 결혼을 축복할 것이며 그것이 당신을 향한 하나님의 선하신 뜻이 될 것이다. 혹여 A가 하나님이 정하신 배필인데 B와 결혼했기에 내 결혼생활이 불행해질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은 깨끗이 떨쳐버려야 한다. 그러나 당신의 자유로운 선택에는 책임이 따른다. 하나님의 영광과 뜻을 우선적으로 구하는 가운데 내려진 선택이어야 한다.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당신의 지혜를 최대한 활용하여 내린 판단에 근거한 선택이어야 한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알려주시지 않는 미래를 미리 훔쳐보게 하여 하나님이 뜻하신 모든 유익을 앗아가며 자유를 박탈하고 믿음과 소망의 삶을 파괴하는 것은 분명한 마귀의 짓이다. 성경에 기록된 미래에 대한 예언은 모두 하나님의 구원역사를 이루는 특별한 목적을 띠고 있다. 이 구속사와 직접 관련이 없는 개인의 사적인 일을 점치듯 예언하는 예를 성경에서 전혀 찾아 볼 수 없다.
선지동산 53 게재 / 성령의얼굴(3) / 박영돈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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