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기고글] 천국을 들락거리는 사람들 - 박영돈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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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국을 들락거리는 사람들
요즘 입신하여 천국에 다녀온다는 이들이 많다. 토마스 주남 여사가 쓴 “천국은 확실히 있다”는 책이 날개 돋친 듯이 팔렸다. 영문판이 세계 각국어로 번역되었고, 필자가 가지고 있는 한글 번역본은 무려 83쇄나 발행된 것이다. 그만큼 천국체험담에 대한 사람들의 관심이 많은 모양이다.
주남 여사는 그 책에서 자신이 과거 7년 동안 천국을 17번 다녀온 경험을 기록하였다. 예전에 시한부종말론이 기승을 부릴 때도 “내가 본 천국”등의 책들이 쏟아져 나왔다. 재림날짜에 대한 예언이 빗나가자 사람들의 관심을 그토록 끌던 그들의 천국체험담도 외면당하고 거의 폐기처분되었다. 한동안 천국소동이 뜸하더니 주남 여사의 책으로 다시 일어나기 시작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이런 책을 어떻게 평가해야 할까? 이런 천국경험담을 검증할 수 있는 어떤 잣대나 기준을 성경에서 발견할 수 있을까? 물론 어떤 특별한 영적인 체험의 가능성을 완전히 부인할 수는 없다. 그러나 그런 경험은 극히 주관적일 뿐 아니라 환상적인 것이어서 그것이 참된 영적 체험인지를 입증할만한 객관적인 근거가 전혀 없다. 그 여자의 말이 새빨간 거짓말일 수도 있고 참일 수도 있다. 전적으로 독자가 어떻게 믿느냐에 달려있다.
만약 그것이 꾸며내거나 환각에서 비롯된 것이라면 순진하게도 그 말을 굳게 믿은 이들은 완전히 멍청한 바보가 되는 셈이다. 반면에 그 말이 그녀의 영적인 체험에서 나온 진술인데도, 믿지 않았다면 성령님의 계시를 의심하고 불신한 과오를 범한 것인가? 그렇지 않다. 비록 그녀의 진술이 그녀의 어떤 영적인 체험에서 나온 것이라고 할지라도 그것이 성령님의 계시나 역사라는 확실한 성경적인 근거가 없기 때문이다. 의심스러운 것은 믿기보다 의심하는 것이 훨씬 지혜로운 처사이며 성경말씀을 신앙과 체험의 척도로 삼는 올바른 신앙의 자세이다. 그녀는 주님께서 친히 이 책을 쓰라고 말씀하셨다는 것을 누차 강조한다. 주님께서 마지막 때에 많은 영혼들을 주님께로 돌아오게 하는 지상명령을 성취하시기 위해 이 책을 쓰게 하셨다는 것이다(토마스 주남, 조용기 옮김 천국은 확실히 있다!,서울: 서울 출판사, 2009, 62). 과연 그럴까?
그녀는 지옥의 불구덩이에서 자신의 어머니와 친구들이 고통 받는 장면을 보았다고 했다. 그 비참한 광경을 목격하고 슬퍼하는 자신을 위로하며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고 한다. “딸아, 나는 네가 그들을 보는 것이 얼마나 가슴 아픈지 알고 있다 그러나 너는 나를 위해 쓰는 책에 이 체험을 반드시 기록하여야 한다. 이것이 네가 기억하고 있는 대로 네 부모님과 친구들을 보여준 이유이다. 너는 세상 사람들에게 지옥의 실상을 경고해야만 한다. 내가 나의 교회를 내게로 거두어들이기 위해 재림하기 전에 될 수 있는 한 많은 영혼들이 구원받게 되기를 원한다.”
이 대목에서 베일에 가려진 미혹의 영이 그 모습을 슬며시 드러낸다. 주님이 했다는 이 말은 성경에 기록된 주님의 말씀과는 아주 다르다. 누가복음 16장에 나사로와 부자의 예화가 등장한다. 이 예화에서 나사로는 죽어 하늘에 올라가 아브라함의 품에 안겼고 부자는 죽어 음부에 내려가 고통을 받으며 아브라함을 보고 이렇게 애원한다. “아버지여 나사로를 내 아버지 집에 보내소서 내 형제 다섯이 있으니 저희에게 증거하게 하여 저희로 이 고통받는 곳에 오지 않게 하소서 아브라함이 가로되 저희에게 모세와 선지자들이 있으니 그들에게 들을지니라 가로되 그렇지 아니하나이다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만일 죽은 자에게서 저희에게 가는 자가 있으면 회개하리이다. 가로되 모세와 선지자들에게 듣지 아니하면 비록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는 자가 있을지라도 권함을 받지 아니하리라 하였다 하시니라”(눅16:27-31).
이 예화를 통해 주님께서 우리에게 가르쳐 주시는 진리는 무엇인가? 성경말씀, 즉 모세와 선지자들로 대변되는 구약성경말씀을 듣지 않으면 아무리 죽은 자가 살아나서 지옥의 고통을 생생하게 증언해도 별 효과가 없다는 것이다. 세상 사람들의 일반적인 생각은 그 예화 속의 부자와 같이 성경말씀보다는 죽었다 살아난 자가 전하는 지옥과 천국에 대한 생생한 증언을 사람들이 더 잘 믿으리라고 보는 것이다. 그러나 주님의 판단은 그렇지 않다. 주남 여사는 이 주님의 말씀과 상충되는 세상적인 생각을 주님의 음성과 말씀인 것처럼 위장하여 전하고 있다. 이것은 전형적인 미혹의 영의 역사이다. 주님께서는 죽어서 실제 천국을 경험하고 지옥을 목격한 사람이 살아서 지상으로 돌아와 그 본 것을 증언해도 별 효과가 없다고 하셨다. 그렇다면 주남 여사의 증언은 훨씬 더 효과가 없을 것이다. 그녀는 죽어서 실제 천국과 지옥을 체험하고 부활해서 그것을 증언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고작 어떤 환상 속에 체험한 것을 진술하고 있을 뿐이다. 그러니 죽었다 부활한 사람의 증언보다 훨씬 신빙성이 떨어질 것이다. 이런 황당한 얘기를 통해 사람들을 주님께로 돌이키게 하는 것이 주님의 뜻이라는 주장은 성경에 분명히 계시된 주님의 말씀을 뒤집어엎는 것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완성된 계시의 말씀을 통해 사람들을 믿게 하는 것이 성경에 분명히 밝혀진 주님의 뜻이다. 이 복음을 듣고 믿지 않는 이들은 어떤 천국과 지옥에 대한 증언을 들어도 믿지 않는다. 믿음은 오직 성령의 감화로만 가능한 것이다. 이 성령의 감동은 복음의 진리를 통해 역사한다. 이 복음의 진리를 제쳐놓고 허황된 천당이야기에 집착하는 이들에게는 어둠의 영의 미혹케 하는 은밀한 역사가 함께 한다.
그런 책은 사람들의 호기심을 자극할지는 모르나 하나님에 대한 온전한 믿음을 갖게 하지는 못한다. 오히려 사람들의 관심을 성경말씀으로부터 분산시켜 허황된 신화에 쏠리게 하고 말씀을 통해 믿음을 자라게 하시는 성령의 역사를 방해하며 복음의 진리를 혼잡케 하는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
주남 여사는 천국을 방문할 때마다 심한 진동과 몸에 진통을 경험했다고 한다. “나는 내 몸이 침대에서 들려지는 것 같은 이상한 느낌이 들었습니다.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도 알지 못하면서, 나는 비명을 지르며 두 팔을 마구 휘두르기 시작했습니다. 마치 내 뱃속에 있는 것들이 내게서 떨어져 나가는 것 같았습니다.” (p.74). \"때로 초저녁에 주님과 두서너 시간을 함께 일하는 경우에도 나는 지쳐 잠들어 버렸고 그러면 주님은 새벽 2시나 3시에 나를 깨우셔서 다시 두세 시간 일을 하게 하셨습니다. 그런 밤을 보내고 난 다음날에는 몸이 너무나 지쳐서 얼굴이 수면부족으로 인해 퉁퉁 부어올라 있었습니다.” \"주님께서는 내 손을 사용하셔서 머리끝에서부터 발끝까지 내 몸의 모든 부분을 반복해서 만지셨습니다. 나는 마치 때를 씻어 내는 것처럼 손으로 나의 몸 전체를 문지른 다음 다시 더러워진 손을 씻어 내는 것 같이 양손을 잡곤 하였습니다. 이 모든 것들을 내게 지시 하신 분은 성령이셨습니다.”(p.324). 이렇게 몸을 만지거나 괴롭게 하는 것이 과연 성령의 역사라고 할 수 있는가? 그녀의 책에는 이같이 도저히 성경적이라고 볼 수 없는 해괴한 이야기로 가득한다.
성경은 신비한 체험을 자세히 간증하거나 진술하는 것을 전혀 권장하지 않고 있다. 오히려 그런 행동이 아무런 유익과 의미가 없고 역효과만 자아낼 수 있다는 점을 주지시키고 있다. 그러기에 바울사도는 참으로 삼층천에 다녀온 체험을 했음에도 그에 대해 함구하고 있다. 사람들이 지나치게 생각할까 봐 그에 대해 말하는 것을 자제하였다.
왜 바울사도는 그 놀라운 천국체험담을 주남 여사처럼 그의 서신서에 기록하지 않았는가? 왜 그는 그가 보고 경험한 천국을 전함으로 사람들을 주님께 인도하려고 하지 않았는가? 그것은 주님께서 말씀하신 바와 같이 그렇게 하는 것이 복음전도와 영적성숙에 별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그가 잘 알았기 때문이다. 또한 사람들이 그를 지나치게 생각하므로 인간이 높임을 받을 수 있으며, 영적세계에 대한 수많은 억측들과 공상들이 난무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었다. 이런 바울의 태도가 성경에 분명히 명시된 주님의 말씀과 부합된 자세이며, 거룩한 수줍음으로 가득한 성령 사역자의 모습인 것이다.
우리는 성경에 계시된 것으로 만족하는 신앙생활을 해야 한다. 아직도 허락되지 않은 천상의 세계를 엿보려는 영적관음증을 경계해야 한다. 이는 너무 성급하게 천국을 청구하는 영적인 조급함의 소치이다.
선지동산 56 게재 / 성령의 얼굴(6) / 박영돈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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