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기고글] 금이빨 소동 - 박영돈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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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이빨 소동
요즘 어떤 집회에서는 멀쩡한 이를 금니로 바뀌게 하는 해괴한 현상으로 사람들을 현혹시킨다. 교인들을 바르게 지도해야 할 목사들마저 영적인 분별력이 흐려져 이런 집회에 기웃거리며 그런 초능력을 전수받으려고 한다. 안성에 있는 모 수양관에서 이런 집회가 열렸을 때 수백 명의 목회자들이 모여들었다. 집회를 인도하는 목사는 모인 사람들을 둘씩 짝을 짓게 하고 서로의 입 안에 아말감으로 때운 이를 확인하게 한 뒤, ‘예수의 이름으로 아말감은 금니로 변하라’고 외친다. 그러면 잠시 후 여기저기에서 금니로 변했다고 하는 환성이 터져 나온다. 참으로 희한한 일이다. 모두에게 그런 기적이 일어나지는 않았지만 상당수의 사람들이 그것을 목격했다고 말한다. 처음에는 그런 현상은 성령의 역사일 수가 없다고 생각했던 이들도, 막상 그런 기적이 눈앞에서 벌어지는 것을 본 후에는 어떻게 판단해야 할지 매우 혼란스러워한다. 이같이 기적 앞에서는 이성적이고 매우 상식적인 판단력마저 무기력해지기 쉽다.
기적이 일어났다고 해서 그것이 반드시 성령의 역사라고 보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성경은 사탄도 성령의 능력을 모방하여 이적과 표적을 행하므로 미혹되지 말라고 말한다. 미국에서 어떤 그리스도인 여성은 두 발의 길이가 서로 5센티미터 정도 차이가 났는데, 마술적인 힘을 행사하는 한 ‘치유자’에게 놀랍게 치유를 받았다. 그런 후에 불행하게도 그녀는 심한 우울증과 심리적인 억압에 시달리다가 결국 목사에게 그 사실을 고백하고 죄를 회개하였다. 그러자 즉시 심리적인 억압은 떠나가고 동시에 그녀의 발 길이는 원상태로 되돌아왔다. 표적과 기사는 기독교만이 전유한 것이 아니다. 다른 종교들에서도 나타난다. 이슬람교의 성자로 알려진 바바 화리드(Baba Farid)는 죽은 자를 살리고, 여러 가지 불치의 병들을 고치고, 마른 대추야자 열매를 황금덩어리로 변화시키는 놀라운 기적을 행했다고 알려졌다. 이외에도 이와 유사한 보도들이 무수히 많다.
그러므로 신기한 현상이나 치유의 기적이 일어났다고 해서 무턱대고 그것을 성령의 역사라고 믿어서는 안 되며, 반드시 성경적으로 검증해서 분명히 믿을만한 근거가 있는지 확인하고 믿어야 한다. 의심과 비판적인 의식이 항상 나쁜 것만은 아니다. 의심이 없다고 무조건 신앙이 좋다고 볼 수 없다. 내가 믿는 것이 과연 확실한 것인지 살펴보지 않고 믿는 것은 어리석은 믿음이며 진지함이 없는 믿음이다. 지금은 그 어느 때보다도 객관적이고 냉철한 판단력이 필요한 시기이다.
기적이 일어났다는 사실보다 더 우선적으로 고려해야 할 점은 그런 현상이 진정한 성령 사역의 특성을 띠고 있는지를 살펴보는 것이다. 예를 들어, 전에 아프리카의 어떤 선교지에서 이가 빠지고 잇몸이 상해 음식을 못 먹는 이들에게 새 이가 생기는 기적이 일어났다는 보도가 있었다. 그 보도의 진위를 확인할 수는 없지만, 만약 그것이 사실이라면 그러한 기적은 하나님이 베푸신 긍휼의 손길이라고 볼 수 있다. 또한 가난하여 의료혜택을 전혀 받을 수 없는 사람이나, 잇몸 상태가 나빠서 임플란트가 불가능하여 음식 섭취에 심한 어려움을 겪는 이에게 이가 재생되는 기적이 일어나 하나님의 영광과 사랑이 나타난다면 그것은 성령의 역사라고 판단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멀쩡한 이를 요술과 같이 금니로 둔갑시키는 것은 성령의 역사라 볼 수 없고 오히려 미혹의 영의 장난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성령님은 진리와 질서의 영이시기에 특별한 목적과 의미 없이 기적을 남발하여 우리를 혼란과 무질서에 빠지게 하시지 않는다. 성령님은 지금도 능력으로 역사하신다. 그러나 성령님은 기적을 아주 경제적으로 행하신다. 분명한 경륜적 목적이 없이 기적을 함부로 행하시지 않는다. 다시 말하면, 성령님은 기적을 아끼신다. 그것은 그런 은혜를 베푸시는 데 인색하시기 때문이 아니라, 우리가 육체 가운데 살도록 정하신 창조의 질서를 스스로 무너뜨림으로 우리의 삶을 혼란스럽게 하시지 않기 위함이다.
어떤 이들은 그런 초자연적인 현상이 전도에 도움이 된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그런 표적이 사람들의 호기심을 자극할 수 있을지는 모르나, 그들의 영혼을 주님 앞으로 인도하는 데는 별로 도움이 되지 않는다. 오히려 거침돌이 될 가능성이 크다. 기적과 표적으로 사람들의 의심과 불신을 단숨에 날려 버려 믿지 않을 수 없도록 그들을 굴복시킬 수 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하나님이 원하시는 참된 회개와 사랑의 반응을 이끌어 낼 수는 없다. 만약 기적으로 인간을 변화시킬 수 있었다면 주님이 십자가의 길을 가실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죄인들의 심령을 변화시켜 그들에게서 진정한 사랑의 순종을 이끌어 낼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십자가뿐이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표적을 구하는 유대인들에게는 이 십자가의 도가 거리끼는 것이나 믿는 자에게는 구원에 이르게 하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하였다(고전 1:23-24). 십자가의 복음이 아닌 마술과 같은 표적으로 사람들을 믿게 하려고 하는 것은, 인간을 구원하는 십자가의 능력을 온전히 의존하지 못하는 불신앙의 증거라고 할 수 있다. 또한 이는 십자가의 신학에서 벗어나 번영신학, 영광의 신학으로 변질된 메시아관이 교회에 은밀히 침투하고 있는 징후이기도 하다. 과거 유대인들과 같이 지금도 사람들은 십자가의 메시아가 아니라 기적과 표적으로 세상을 제압하는 만능의 메시아를 원하고 있다. 십자가 밑에서 군중들이 원했던 것이 바로 그런 메시아였다. 그들은 “네가 메시아이면 십자가에서 내려와 너의 능력을 보여 달라. 그러면 우리가 믿겠노라”고 소리쳤다.
사람들을 제압하고 컨트롤하기에 초자연적인 현상과 표적보다 더 효과적인 방편은 없다. 힘없는 인간이 가장 숭배하는 것이 초자연적인 힘이며 인간은 그 앞에서 꼼짝없이 압도될 수밖에 없다. 그래서 사역자들은 성령님을 따라가는 느리고 힘든 길을 회피하고 속성과를 택하려는 강한 유혹을 받게 된다. 기적의 전법과 초능력을 도입하여 사람들을 압도하려고 한다. 종교의 주식시장에서 기적만큼 인기 있는 상품은 없다. 어떤 목사들은 온갖 세미나를 돌아다니며 쓰러뜨리는 기술, 방언과 예언하는 법을 습득하고 병고치고 귀신 쫓아내는 권능을 전수받아 정체된 목회의 돌파구를 찾으려고 몸부림친다. 말씀을 아무리 전해도 별 변화가 없지만 병 고치는 능력을 받아 암환자라도 고쳐서 그 소문이 퍼지면 텅 빈 교회당이 금세 가득찰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니 어찌 이 달콤한 유혹을 뿌리칠 수 있겠는가?
복음사역자들은 비록 느릴지라도, 사역의 성과가 잘 나타나지 않아도 복음의 정도를 따라 주의 일을 해야 한다.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사역하는 것은 바울이 에베소 교회에서 그랬던 것처럼 모든 겸손과 눈물과 오래 참음으로 일하는 것이다(행 20:19,31). 하나님의 종은 하나님의 소모품이라는 말이 있다. 복음사역이 무한히 에너지와 시간을 소모하는 무의미한 일 같이 보일 수 있다. 그러나 이렇게 소모하는 것같이 보이는 사역을 통해서만 하나님의 낭비하는 사랑과 은혜가 밝히 증명되는 것이다. 하나님은 그 귀한 은혜와 사랑을 자격 없고 가치 없는 자들에게 무한히 탕진하시는 하나님이시다. 이 하나님의 사랑이 탕자를 돌이키게 하듯이, 복음사역자들의 소모하는 것 같은 말씀 사역을 통해 결국 완고한 죄인들이 하나님의 인자하심에 설복되는 것이다.
선지동산 58호 게재 / 성령의 얼굴(8) / 박영돈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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