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기고글] 목사는 부르심의 자리를 지켜야 한다 - 김순성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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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목회자들이여, 끝까지 한길을 걸어가라 -
목회자로서의 자신과 사역에 대해 자부심을 느끼고 있는가?
스스로 자신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혼란을 겪은 적이 없는가?
목사로서 당신의 장래 목표는 무엇인가?
목사가 된다는 것처럼 세상에서 ‘위험’한 일은 없다. 전문성이라는 측면에서 목사는 같은 사람을 다루는 의사나 판검사, 변호사에 비해 훨씬 더 위험하다. 무엇보다도 후자가 측정가능하고 눈에 보이는 일을 다루는데 비해, 목사가 하는 일은 눈에 보이지도 않고, 손에 잡히지도 않는 영적인 일이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과 그분이 하시는 일과 관련되기 때문이다. 영적 세계에서는 1+1=2가 아니다. 때로는 영(제로)이 되기도 하고, 때로는 100이 되기도 하고, 1000이 되기도 한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은 우리 인간이 통제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다 보니 신학을 공부하고 오랜 세월 목회를 해도 딱히 손에 잡히는 것이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목사가 하는 일에 따라 영혼이 살기도 하고 죽기도 한다. 이 얼마나 위험한 일인가. 신분에 대한 인정과 보상을 생각해 보자. 고액의 연봉은 차치하고 사회적 인지도가 보장되는 의사나 변호사와는 달리 목사직은 전혀 그렇지 못하다. 교회 밖에서는 물론이고, 요즘은 교회 안에서도 목사는 별로 존중받지 못한다. 겉으로는 점잖게 대접받지만 속으로는 무시당하거나 종종 악평을 듣는 자리가 목사라는 신분이다. 보수에 관한한 한평생 일용할 양식 수준에 만족해야 하고 노후 보장조차 불확실한 것이 대다수 목사들의 현실이다. 이 얼마나 위험천만한 신분인가.
사람이란 본래 자신이 하는 일 속에서 무언가 가시적 성취와 이에 걸맞은 인정과 보상을 통해 자기존재를 확인하며 삶의 의미와 보람을 찾는 존재이다. 그런데 아무리 오랜 세월 사역을 해도 뭔가 손에 잡히는 것이 없고, 자기성장이나 발전이 없으며, 합당한 보상도 따르지 않는다면 이보다 더 큰 고역과 불행이 따로 없다. 이 때문에 오늘날 많은 목회자들이 자신이 목사로 부름 받은데 대한 자긍심을 잃어가고 있다. 사역에 자신감을 잃고 무력감에 빠지거나 종종 교인들에게 실망과 환멸을 느껴 교회를 떠나기도 한다. 한편으로 목회자들은 전문가가 되려고 한다. 설교, 교육, 상담, 행정 전문가, 특정 프로그램 전문가 등등. 뭔가 손에 잡히는 것, 가시적인 성과에 집착하고 그 일에 목숨을 건다. 그래서 유능한 목사로 인정받고 싶어 한다. 하나같이 위태로운 ‘목사’의 길을 피하고 싶어 하는 것이다. 그래야 ‘덜’ 위험한 목사가 되기 때문이다. 유능한 지도자, 특정 분야의 전문가가 되는 것이 잘못된 것이라는 말이 아니다. 모두 좋은 목사가 되기 위해 필요한 자질이다. 문제는 ‘목사’로서의 고유한 정체성을 포기하면서까지 전문 기능인이 되려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오늘날 교회 안에 ‘목사’를 찾기 어렵다. 잡다한 종교업무를 처리하는 행정가, 종교의식에 충실한 성직자, CEO같은 지도자는 많지만 정작 ‘목사’는 드물다.
목사가 된다는 것, 목회를 한다는 것은 전문가가 된다는 것과는 거리가 멀다. 목사는 부르심이요, 목회란 부르심의 자리를 지키는 것이기 때문이다. 목사는 문제를 해결하는 해결사나 어떤 일의 전문가로 부름 받은 자가 아니다. 굳이 전문가라는 이름을 붙이자면 ‘지금’ ‘여기’에 일하시는 ‘하나님’을 주목하는 전문가로 부름 받은 자다. 유진 피터슨에 의하면 목사란 “사람들 사이에서 그리고 사람과 하나님 사이에서 ‘지금 일어나고 있는 일’에 주의를 기울이도록 공동체 안에 세움 받은 사람”이다. ‘지금’ ‘여기’에 일어나고 있는 일이란 하나님이 자기 백성들 속에서 주도하시는 일이다. 그분의 임재와 구원역사(役事)를 가리킨다. 이를 주목하고, 회중들에게 이 하나님을 주목하도록 부름 받은 자가 목사다. 모호하고 위험해 보이지만, 바로 이 부르심의 자리에 목사 됨의 존엄과 신비가 감취여 있다. 목사만이 누리는 영광이 숨어 있다. 모호해 보이지만 확실하고, 위험해 보이지만 신비로운, 역설적인 자리가 바로 이 부르심의 자리다. 앨리스터 캠벨은 목사를 가리켜 “지혜로운 바보”라고 묘사했다. 목사의 존재방식이 지닌 역설적인 측면을 성경적 이미지로 표현한 말이다. 성경에 의하면 목사란 지혜로우면서 동시에 바보가 되어야 하는 자리다. 바울이 말하는 십자가의 역설에 귀기울여보자.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첹련한 것이요,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우리는 십자가에 못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 너희 중에 누구든지 이 세상에서 지혜 있는 줄로 생각하거든 미련한 자가 되어라 그리하여야 지혜로운 자가 되리라 이 세상 지혜는 하나님께 미련한 것이니... (고전1:18, 23-24; 3:18-19).
바울에 의하면 하나님의 지혜와 능력은 세상에서 어리석고 미련한 것이다. 이 때문에 세상지혜와 능력이 지배하는 ‘지금’ ‘여기서’ 하나님을 주목하는 목사의 길을 걷는다는 것은 곧 지혜로운 바보가 되는 것을 의미한다. 다시 말해서 십자가의 눈으로 세상을 뒤집어볼 줄 아는 거룩한 바보가 됨을 뜻한다. 세상이 말하는 지혜 속에서 어리석음을 보고, 세상이 인정하는 어리석음 속에서 하나님 나라의 지혜를 볼 줄 아는 혜안을 가진 자가 됨을 말한다. 세상이 부러워하는 강함 속에서 약함을 보고, 세상이 무시하는 약함 속에서 하나님 나라의 강함을 보는 자가 됨을 뜻한다. 오늘 교회가 당면한 위기가 무엇인가? 십자가의 공동체인 교회가 세상 지혜와 능력으로 강해지려 한다는 것이다. 그 이유가 무엇인가? 목사가 부르심의 자리를 상실했기 때문이다. 십자가에 못박힌 그리스도를 주목하는 대신 세상 지혜, 세속 권세로 강해지려 하기 때문이다. 그 결과 지금 여기에 일하시는 하나님이 보이지 않는다. 복음이 종교가 되고, 하나님의 일이 사람의 일로, 하나님의 방법이 사람의 방법으로 대치되고 있다. 인내해야 할 때 조급하고, 기다려야 할 때 서두른다. 낮아져야 할 때 높아지려 하고, 비워야 할 때 채우려한다. 목사 자신이 ‘지금’ ‘여기서’ 지혜로운 바보가 되기를 거부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목사는 많으나 목사다운 목사가 드문 시대이다. 목사는 자기 열심, 자기 지혜로 만들어지는 존재가 아니다. 목회 역시 자기능력 자기재주로 되는 것이 아니다. 비록 더디어도 부르심의 자리를 끝까지 지킬 때, 그를 부르신 하나님의 손이 빚어가는 것이다. “한걸음 한걸음이 도착이다”는 어느 시인의 말과 같이 지금 손에 잡히는 것 없고, 보이는 것 없어도 서두르지 않고 인내하고 기다리며 부르심의 길을 걸어갈 때, 어느 덧 하나님의 지혜와 능력 안에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그렇다면, 부름 받은 목사로서 어떻게 자기 정체성을 확립해 갈 수 있을까?
1. 당신의 내면의 상태를 정직하게 돌아보라.
지금 목사로서 자신의 소명에 대한 자긍심과 사역에 대한 긍지와 보람을 느끼고 있는가?
부담감, 불만, 의무감 속에서 소명의 길을 걷고 있는가? 아니면 깊은 자괴감과 함께 목사로서 자신의 정체성이 혼란스럽게 느껴지는가? 지금 당신의 목회와 사역을 움직이는 근본 동기가 무엇인지 성찰하라. 하나님 영광인가? 자기 인정인가? 당신 속에 비교의식, 승부의식이 지배하고 있지 않은가?
2. 지금 당신이 인식하고 있는 하나님에 대해 점검하라.
당신이 회중에게 설교하고 가르치고 있는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인가? 이 시대문화가 만들어낸 능력(power)의 하나님인가?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통해 계시된 하나님인가? 최근 당신이 말씀 묵상이나 기도 속에서 인격적으로 만난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인가?
3. 부르심의 목적이 무엇인지 지속적으로 묵상하라.
하나님은 당신의 부족과 한계를 아시고 부르셨음을 기억하라. 당신에게 무언가를 이루어내기를 기대하지 않으신다. 당신을 부르신 하나님만 주목하고, 그와 연합하고, 당신을 통해 하나님 자신이 드러나기를 원하신다.
4. 어떤 상황에서도 쉬지 않는 기도를 훈련하라.
‘지금’ ‘여기서’ 기도하는 자만이 ‘지금’ ‘여기서’ 일하시는 하나님을 주목할 수 있다. 어떤 일보다도 기도가 우선되어야 한다. 당신의 삶에 잃어버린 기도를 회복하라.
5. 인내와 기다림으로 끝까지 한길을 걸어가라.
조급해하지 말라.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라. 부르심에 신실한 목사가 되기 위한 한 가지 목표를 향해 한걸음 한걸음 정도(正道)를 걸어가라.
선지동산 60호 게재 / 목회리더십과 영성(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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