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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기고글] 예루살렘 성도들의 부활 - 변종길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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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댓글 0건 조회 8,911회 작성일 11-11-03 16: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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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루살렘 성도들의 부활


예수님이 돌아가셨을 때 일어난 부수적 현상에는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성소의 휘장이 위에서부터 아래로 찢겨진 것이다(마 27:51상, 막 15:38). 다른 하나는 땅이 진동하고 바위가 터지고 무덤들이 열리며 자던 성도들의 몸이 많이 일어난 것이다. 이들은 예수님의 부활 후에 무덤에서 나와 거룩한 성에 들어가서 많은 사람들에게 보였다고 한다(마 27:51하-53). 이 두 번째 사건은 오직 마태복음에만 기록되어 있다.
이 두 번째 사건은 몇 가지 점에 있어서 매우 특이하다. 첫째는 예수님의 부활 이전에 성도들의 부활이 있었다니 매우 이상하다. 우리는 예수님의 부활이 먼저 있고 나서 - 그래서 예수님은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라고 불린다(고전 15:20) -- 마지막 날에 성도들의 부활이 있다고 알고 있다(고전 15:23). 그런데 여기 마태복음에서 예수님의 죽음 직후에 예루살렘 성도들이 부활했다고 말한다. 둘째는 이 부활한 성도들이 무덤에 머물다가 예수님의 부활 후에 무덤에서 나와서 거룩한 성(예루살렘)에 들어갔다고 한다. 왜 이들은 부활 후에 바로 무덤에서 나오지 않고 예수님의 부활 때까지 기다렸던 것일까?
그래서 많은 사람들은 마태복음의 이 기록을 의심한다. 가톨릭 학자인 껄러스(J. Keulers)는 이 본문의 진정성을 의심하면서, 이것은 마지막 날에 성도들이 부활할 것을 미리 ‘예기적(豫期的)’으로 말한 것이라고 한다. 훌륭한 개혁주의 주석가인 흐로쉐이드(F. W. Grosheide)도 많은 질문들을 제기하면서 명확한 답을 주지 않는다. 이것은 아마도 성도들의 ‘참된 부활’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죽음’의 큰 의미를 나타내기 위해 행하신 사실인 것 같다고 한다. 그리고 확실한 것은 알 수 없다면서 미결 상태로 남겨 둔다. 헤르만 리덜보스는 이 성도들의 부활은 예수님의 ‘부활’과 동시에 또는 그 후에 일어났다고 본다. 칼빈도 예수님의 ‘부활 후’에 이들이 부활했다고 한다. 이들이 사흘 동안 무덤에서 살아 숨 쉬었다고 보는 것은 불합리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예수님의 죽음 직후에 무덤이 열렸으나, 예수님의 부활 후에 성도들 중 얼마가 살아서 무덤을 나와 성에서 보였다고 한다. 윌리엄 헨드릭슨은 당시 예루살렘 성도들이 그리스도의 죽음 때에 정말로 부활했으며 무덤을 나왔다가, 예수님의 부활 후에 예루살렘 성에 들어가서 많은 사람들에게 보였다고 한다. 그들은 ‘영광스러운 몸’으로 부활했으며 다시는 죽지 않았다고 본다. 헨드릭슨은 53절 끝의 ‘나타났다’를 부활하신 예수님의 ‘현현(顯現)’과 같은 것으로 본다.

이처럼 이 본문에 대해 다양한 견해들이 있으며 개혁주의 진영에서도 확립된 견해가 없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본문을 주의 깊게 관찰하면서 본문이 말하는 바가 무엇인가를 생각할 필요가 있다. 그러면 본문(51-54절)은 예수님의 죽음의 결과로 어떤 일들이 일어났는가를 말하는 문맥임을 알 수 있다. 예수님의 죽음에 수반하는 부수적인 사건들로는 성소의 휘장이 찢어진 것, 땅이 진동한 것, 바위들이 찢어져서 둘이 된 것(51절)과, 무덤들이 열린 것, 자던 성도들의 몸이 많이 일어난 것(52절)이다. 따라서 죽은 성도들의 몸이 일어난 것은 예수님의 죽음 직후임이 분명하다. 그러나 이들은 예수님의 부활 후에 무덤에서 나와서 거룩한 성(예루살렘)에 들어가 많은 사람들에게 보였다고 마태 자신이 분명히 말하고 있다(53절).
그렇다면 이들의 부활은 나사로나 나인 성 과부의 아들 또는 야이로의 딸의 부활과 같은 성격의 것이라고 생각된다. 여기에 사용된 ‘나타나다(엠파니조마이)’는 단어가 꼭 영광스러운 몸으로 부활하는 것을 뜻한다는 생각은 잘못이다. 이 단어는 일반적으로 ‘누구 앞에 나타나다’(히 9:24, 요 14:22) 또는 (능동태 ‘엠파니조’의 경우) ‘알리다, 분명히 하다’(행 23:22, 히 11:14)는 의미를 가진다. 여기에 이 성도들의 몸이 다시는 죽지 아니하는 ‘영광스러운 몸’을 입었다는 기록이나 시사는 없다. 사람들은 너무나 쉽사리 이들 성도들의 부활과 예수님의 부활을 같은 선상에서 이해하고 있다. 그러나 본문은 ‘부활’이 아니라 ‘예수님의 죽음’에 대해 말하고 있는 문맥이다.
따라서 우리는 여기의 성도들의 ‘일어남’을 예수님의 ‘죽음’으로 말미암은 부대사건들 중의 하나로 이해해야 할 것이다. 곧 지진과 바위들의 깨어짐과 같은 맥락에서 이해하여야 한다. 하나님이 시내산에 강림하실 때에 큰 지진과 빽빽한 구름과 불과 우렛소리가 있었듯이(출 19:16-19),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이 죽어서 이 세상을 떠나실 때에 아무런 일들이 없을 수 없었을 것이다. 하나님의 아들이 이 세상에 오셨을 때 하늘에 특별한 별이 나타나고 천군천사들이 하나님을 찬양했듯이(마 2:1-12, 눅 2:13-14), 하나님의 아들이 인류를 위한 구속 사역을 완성하시고 세상을 떠나셨을 때 이 땅은 자기 몸을 흔들어 반응한 것이다.
무덤이 열렸다는 것은 사망의 세계가 열렸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이제는 사망이 더 이상 잠자는 성도들을 잡아 둘 수 없다는 것을 나타낸다. 죄의 권세가 무너졌기 때문에 사망의 권세도 더 이상 힘을 쓰지 못하게 된 것이다(고전 15:54-57, 히 2:14).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사망 권세를 정복하셨으며, 지금 음부와 사망의 열쇠를 가지고 계신다(계 1:18). 그래서 음부의 세계, 사망의 세계가 그 죽은 자들을 내어 놓은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예루살렘의 이 성도들이 부활하신 예수님과 같은 ‘영광스러운 몸’, ‘신령한 몸’(고전 15:42-44))을 입었다고 볼 필요는 없다. 이들의 부활은 예수님께서 죄와 사망 권세를 폐하셨다는 것과 그 결과로 장차 성도들이 부활할 것을 보여주는 것으로 족하며, 실제로 마지막 날에 입게 될 부활의 몸을 앞당겨 입을 필요는 없는 것이다. 만일 이들이 영광스러운 몸을 입었다면, 이들은 다시 죽지 아니하였을 것이며 지금 하늘나라에서 부활의 몸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낙원의 성도들은 다 ‘영(프쉬케)’의 상태로 있는데, 이들 예루살렘 성도들만 예수님과 마찬가지로 ‘부활의 몸’을 가지고 있다면 매우 이상하게 될 것이다. 그렇다면 이들은 사도들보다도 더 특별한 지위를 누리게 되며, 마지막 날에 부활할 필요도 없게 될 것이다.
우리는 지금 하늘나라에서는 오직 예수님만 부활의 몸을 입고 있다고 믿는다. 모든 성도들은 이 세상 끝날에 곧 예수님이 재림하실 때에 부활의 몸을 입게 될 것이다. 잠깐 살아났다가 다시 죽은 나사로, 나인 성 과부의 아들, 야이로의 딸도 마찬가지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죽음 직후에 무덤에서 일어난 예루살렘의 성도들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따라서 이들은 무덤에서 일어난 후에 얼마 동안 살다가 다시 죽었다고 보는 것이 합당할 것이다.

그러면 마태는 왜 여기에 이 사실을 기록했을까? 그 이유는 첫째, 이 사건이 당시에 실제로 일어났기 때문이다. 성경은 실제로 일어난 사실을 기록한 책이며 실제 역사이다. 둘째로, 이 사건은 예수님의 죽음이 성취한 것이 무엇인가를 나타내는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마태는 예수님의 죽음 직후에 있었던 사건 두 가지를 기록해 주고 있는데, 그것들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지는 것들이다. 첫째는 성소의 휘장이 찢어진 사건으로서, 이것은 이제 우리에게 하나님께 나아가는 ‘새롭고 산 길’이 열렸음을 의미한다(히 10:20). 둘째로 무덤이 열리고 잠자는 성도들의 몸이 일어난 것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우리의 모든 죄를 담당하심으로써 이제 ‘죄와 사망의 권세’가 깨어졌다는 것을 보여준다(히 2:14). 이 두 가지는 다 예수님이 십자가의 죽음으로 이루신 것이며, 모든 인류에게 중대한 영향을 끼치는 불멸의 업적이다. 따라서 무덤이 열리고 잠자는 성도들이 무덤에서 일어난 사건은 예수님의 부활 후에 일어난 것이 아니라, 마태가 말하고 있는 것과 같이 예수님의 죽음 직후에 일어난 것이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에게 나타났다”는 것은 부활하신 예수님의 경우처럼 나타났다가 사라졌다가 하는 ‘현현 사건’이 아니라, 말 그대로 그들이 살아났다는 것을 증거하는 ‘나타남’이다. 그런데 이 ‘나타남’은 예수님의 부활 후에 이루어졌다. 그 이유는 예수님의 부활이 중요하기 때문에 그들도 예수님의 부활을 기다려야만 했기 때문이었다. 사망 권세를 이기시고 부활하신 것은 예수님의 부활에 의해 최종적으로 성취되기 때문에(고전 15:54, 14-18), 죽은 성도들은 기다려야만 했던 것이다. 예수님이 부활의 주인공이고 첫 열매이시다.
그러면 무덤에서 일어난 이들 성도들은 그 사흘 동안에 어디에 있었던 것일까? 본문은 이들이 예수님의 죽음 직후에 일어났다가 예수님의 부활 후에 무덤에서 나왔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그들은 성 금요일에 일어나서 무덤 안에서 기다리다가 예수님의 부활 후에 무덤에서 나와 예루살렘 성으로 들어갔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여기에 아무런 이상이 없다. 우리에게 이상하게 생각되는 것은 이 사건이 우리가 일상적으로 경험할 수 없는 ‘특별한 사건’이기 때문이다. 본문은 바로 그런 특별한 사건이 일어났음을 말한다. 그리고 그 특별한 사건은 예수님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사망 권세가 깨어지고 정복되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선지동산 60호 게재 / 신약난제해설(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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