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기고글] 주여 주여 하는 자 - 변종길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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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여 주여 하는 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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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은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고 말한다(마 7:21). 여기서 ‘주여 주여 하는 자’는 누구일까? 한국의 어떤 신학자에 의하면, 이 표현은 부정적인 의미가 아니라 긍정적인 신앙고백이라고 말한다. 왜냐하면 신앙고백은 필요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또 문법적으로 여기에 부분 부정이 사용되어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주여 주여 하는 자
물론 부분 부정이란 것은 맞지만, 본문의 문맥을 보면 전체적으로 부정적 뉘앙스가 지배하고 있다. “주여 주여” 하는 자 중에 혹 일부 긍정적인 사람들도 있을 수 있겠지만, 전체적으로 보면 부정적 의미가 강하다. 우선 예수님은 이들이 “천국에 들어가지 못한다”고 말한다. 둘째, “주여 주여” 하는 반복이 이미 부정적 의미를 시사하고 있다(흐로쉐이드). 셋째, 앞절들에 보면 양의 옷을 입고 나아오는 ‘거짓 선지자들’에 대해 말하고 있다. 그래서 칼빈은 여기의 “주여 주여” 하는 자들은 거짓 선지자들뿐 아니라 그와 같은 모든 위선자들을 가리킨다고 보았다. 넷째, 22절에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을 하였다”는 말이 나온다. 따라서 이들은 거짓 선지자들이며 거짓 믿음의 사람들이다.
이처럼 부정적인 문맥이 분명한데도 왜 어떤 신학자들은 이것을 긍정적인 신앙고백이라고 주장하는 것일까? 거기에는 이유가 있다. 곧, 먼저 <믿음>이 있고 거기에 <행위>가 ‘첨가된다’고 주장하기 위해 그런 주장을 하는 것이다. 곧 <믿음> + <행위>로 <천국>에 들어간다고 주장하기 위해서이다. 현재 천국은 ‘믿음’으로 들어가지만, 미래 천국은 ‘행위’로 들어간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행함’은 미래 천국에 들어가기 위한 ‘전제조건’이요 ‘필수조건’이라고 말한다.
한 번도 안 적이 없다
그러면 과연 이 본문은 ‘행함’으로 천국에 들어간다는 것을 가리키는 것일까? 아니다. 본문에서 “주여 주여” 하는 자는 참 믿음이 없이, 형식적으로, 가식적으로 믿는 자들을 의미한다. 거짓 선지자들과 같은 부류의 사람들을 가리킨다. 이들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고,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였지만(22절), 이들은 불법을 행하는 자들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들에 대해 단호하게 말한다. “그 때에 내가 그들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23절) 예수님은 그들을 향하여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여기에 중대한 번역상의 문제가 있다. 개역한글판과 개역개정판은 다 “알지 못하니”로 현재로 되어 있다. 바른성경도 마찬가지다: “나는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한다.” 표준새번역, 새번역, 공동번역, 공동번역 새번역, 현대인의 성경도 다 마찬가지로 현재로 되어 있다. 그러나 원문은 “우데포테 에그논 휘마스”인데, 여기서 ‘에그논’은 ‘기노스코’(알다) 동사의 아오리스트 직설법으로서 과거 시제를 나타낸다. 그래서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였다”, “한 번도 너희를 알지 못하였다”는 뜻이다. 따라서 “내가 너희를 한 번도 안 적이 없다.”라고 번역해야 옳다.
예수님은 “주여 주여” 하는 이 사람들을 가리켜 그들을 “한 번도 안 적이 없다”고 말한다. 전에는 알았다가 이제는 모른다고 하시는 것이 아니다. 처음부터 한 번이라도 안 적이 없다고 하신다. 처음부터 아예 몰랐다는 뜻이다. 곧, 처음에는 믿음이 있었는데 나중에 행함이 없어서 예수님이 모른다고 하시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믿음’은 있는데 ‘행함’이 첨가되지 않아서 천국에 못 간다는 뜻이 아니다. 그들은 처음부터 믿음이 없었고, 그래서 그들은 천국에 들어가지 못한다는 말이다.
이것을 분명히 밝히는 단어가 23절의 ‘에그논’(알았다)인데, 신학자들이 이 단어에 주목하지 않은 것은 매우 유감스러운 일이다. 또한 한국의 번역들이 다 현재형으로 잘못 번역하고 있는 것도 심히 유감스럽다. 그리고 행함으로 천국에 들어가는 게 아니고 믿음으로 들어간다고 강변한 박윤선 박사도 23절의 이 중요한 단어에 대해 전혀 언급하지 않은 것도 매우 아쉬운 일이다. 이상근 박사도 마찬가지다. 그래서 오늘날 예수님의 말씀이 오해되고 곡해되고 있으며, 잘못된 주장이 판을 치고 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런 거짓 선지자들을 “한 번도 안 적이 없다”고 말씀하신다. 영어 성경 번역들은 다 ‘과거 시제’로 바로 번역하고 있다. KJV, NKJV, RSV, NRSV, NASB, NIV, ESV는 다 과거로 번역하고 있다. 단어 하나, 철자 하나 안 틀리고 똑같이 번역하고 있다(I never knew you.). 이들은 한 번도 거듭난 적이 없었으며, 한 번도 참 믿음을 가진 적이 없었다는 것이다. 이처럼 예수님의 말씀은 분명하고 확실하다.
뜻대로 행하는 자
이에 반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란 참 믿음이 있는 자를 가리키는 표현이다. 참 믿음이 있는 자는 거짓 선지자들과 달리,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이들의 행함은 믿음의 열매요, 믿음의 증거이며, 믿음의 표현이다.
이런 점에서 성경은 이런 사람을 ‘의인’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사도행전 24:15에서 사도 바울은 “의인과 악인의 부활이 있으리라.”고 말한다. 여기서 ‘의인’은 하나님을 믿는 자, 그래서 의롭다 칭함 받은 자를 가리킨다. 또한 불신자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의로운 자를 가리킨다. 칭의적 의미와 실제적 의미가 함께 들어 있는 표현이다.
어떤 사람이 하나님에 대해 가지는 관계를 표현할 때는 ‘(하나님을) 믿는 자’ 곧 ‘신자’로 부른다. 예수님의 피로 거룩하게 되었다는 점에서 ‘성도’라고도 부른다. 잠언과 시편에서는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 ‘정직한 자’란 표현도 많이 사용되고 있다. 또 ‘의로운 자’, ‘겸손한 자’, ‘가난한 자’ 등으로 표현하기도 한다. 이런 맥락에서 볼 때, 여기서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는 곧 참 믿음이 있는 자, 의인, 성도를 가리키는 표현이다.
따라서 이 구절은 행함으로 천국에 들어간다는 말이 아니다. 아니, 어느 누구도 행함으로 천국에 들어가지 못한다. 사람이 어떻게 자기의 행위로 천국에 들어갈 수 있단 말인가? 도대체 얼마나 거룩하게 살아야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 것일까? 그래서 행위를 의지하는 자는 반드시 “how much?”의 문제에 봉착하게 된다. 내가 얼마나 많은 선행을 행해야 천국에 들어갈 수 있단 말인가? 도대체 구원의 커트라인이 몇 점이란 말인가? 사람들은 대충 깨끗하게 살면 천국에 들어가겠지 생각하지만, 하나님은 “아니다”라고 말씀하신다. “누구든지 율법 책에 기록된 대로 온갖 일을 항상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저주 아래 있는 자”라고 말씀한다(갈 3:10; cf. 신 27:26).
따라서 이 세상의 어느 누구도 자기의 행위로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한다. 행함으로 천국에 들어간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비록 뛰어난 신학자라 할지라도 행함으로는 천국에 못 들어간다. 오직 예수님을 믿음으로 천국에 들어간다. 오직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의 피 공로를 의지하여 천국에 들어간다.
감사의 규칙
이런 은혜를 받은 사람은 하나님 앞에 ‘감사함’으로 행하게 된다. 허물과 죄가 많은 사람을 독생자 예수님의 피로 구원해 주신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여 선한 일을 행하게 된다. 따라서 성도들이 행하는 선행은 천국에 들어가기 위한 ‘전제조건’으로 또는 ‘필수조건’으로 행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보답’으로 행하게 된다(롬 8:12, 12:1, 마 18:21-35). 이것을 하이델베르크요리문답은 ‘감사의 규칙’이라고 말한다. 성도들이 행하는 모든 선한 행동과 윤리는 구원받은 자의 ‘감사의 규칙’이다. 하나님이 은혜로 주신 구원에 감사함으로 행하는 규칙들이다.
이에 반해 천국에 들어가기 위한 ‘전제조건’으로 선행을 하는 사람은 ‘두려움’으로 행하게 된다. 과연 이 정도의 선행으로 내가 구원받을 수 있을까 하는 의심이 든다. 그래서 행위를 의지하는 사람에게는 구원의 확신이 없다. 가톨릭 신자들이 바로 그러하다. 그래서 구원 못 받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과 불안과 초조함 가운데 선행을 하게 된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여 선행을 하는 사람은 감사함으로 행하게 된다. 하나님이 값없이 주신 구원을 확신하면서,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찬송하면서 기쁜 마음으로 선한 일들을 하게 된다. 이것이 믿음으로 의롭다 받은 성도들이 드리는 감사의 제사이며, 참으로 세상을 변화시키는 빛과 소금이다.
선지동산 61호 게재 / 신약난제해설(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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