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기고글] 마음을 따뜻하게 하는 목회적 대화 이야기 - 하재성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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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을 따뜻하게 하는 목회적 대화 이야기
한 번은 어느 역에서 택시를 탔습니다. 택시 기사님은 60대 후반으로 보이는, 몸집이 작고 주름이 많은 분이었습니다. 내가 택시에 오르자마자 택시 기사님은 보고 있던 신문을 저에게 보여 주었습니다. 서울시 교육감 몇 억 하는 기사였습니다. 그리고는 몹시 화를 내고 거친 말을 쏟아 내었습니다.
“이런 인간들은 다 죽여 버려야 돼!”
그것만이 아니었습니다.
잠시 후 택시가 보행자 신호등 앞에 섰을 때, 사람들이 보행자 신호를 받아 길을 건너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일부는 급히 건너느라 멀리서 뛰어와서 택시 앞을 가로질러 건넜습니다.
“이것들을 확 갈아버릴까 보다.”
그 다음에 이어지는 말들은 더욱 가관이었습니다.
“박** 시대처럼 한국 사람들은 몽둥이로 다스려야 돼요! 누구 말대로 한국 사람들은 때려서 바로 잡아야 돼요. 안 그러면 정신을 못 차려요!”
“이 땅에서 90%의 인간들은 다 쓸모없는 인간들이야!”
“나쁜 인간들은 대**를 다 깨 부숴버려야 돼!”
“여자들이 운전하고 나오는데, 어떤 때는 화가 나서 확 받아버리고 몇 년 살다가 나올 생각도 해요. 나와서 그런 인간을 제가 가만히 두겠어요?”
뒤에 앉아 있는 승객이 어떤 느낌일지도 모르고 운전기사 혼자 욕설을 하면서 거침없이 난폭운전을 했습니다.
그런데 약 20분이 지난 후, 목적지에 도달할 때 즈음이었습니다.
저의 목적지가 도시개발 중인 지역이어서 도로가 포장되지 않았습니다.
더운 낮에 흙먼지를 일으키면서 덜컹거리며 가야 했습니다. 운전하기 불편한 곳이었지요. 기사님의 입에서 놀라운 말이 나왔습니다.
“저는 이런 비포장도로가 좋습니다. 어릴 때의 신작로가 생각나기 때문입니다!”
목소리는 매우 부드러워져 있었고, 말의 내용은 긍정적이고 서정적이기까지 했습니다.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요?
이건 저만의 농담이지만 그 기사님이 누구와 함께 있었느냐가 중요합니다. 그 분은 알 리가 없겠지만 그 분이 상담하는 목사와 함께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내가 어떤 응답을 했던가?’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 분이 운전하다 화나는 일에 대해 이야기할 때, 말이 되는 장면에서 저는 고개를 끄덕여 주었습니다.
“그럴 때 화가 많이 나시겠어요! 운전하시기 힘드시죠?”
이것은 이해와 공감입니다. 상대방의 마음을 읽으면서 화가 난 것과 힘든 것을 이해해 준 것입니다.
하지만 거친 말을 할 때는 공감할 수 없습니다. 부드럽지만 선명하게 응답했습니다.
“아유, 그렇다고 그렇게까지 하시면 되겠습니까?”
그 기사님이 얼마 전 TV에서 15살 아들에게 예수의 영이 임했다며 집회를 하고 다니는 어느 가짜 교회 이야기를 하면서 화를 냈습니다. 그때 저는 덩달아 화를 냈습니다.
“그런 가짜가 있습니까? 그런 사람들 때문에 교회가 욕을 먹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 프로그램을 보고 나서 너무 화가 난 나머지 카톨릭 교회를 다니는 아내에게 호통을 쳤다고 했습니다. 아내는 남편의 말에 못 이겨 자신의 교회 기물들을 보이지 않는 곳으로 숨겼다고 했습니다.
“그렇다고 사모님에게 그렇게까지 하셔서야 되겠습니까?”
“그래서 얼마 후에 다시 제자리에 갖다 놓도록 해 주었어요.”
“아이구, 너무 잘 하셨습니다.”
잠시 후 이 분에게 친구 기사로부터 전화가 왔습니다. 낮 12시인데 막걸리를 함께 마시자는 전화였습니다. 전화를 끊은 후에 제가 물었습니다.
“친구 분에게 힘든 일이 있으신가요? 대낮에 술을 찾으시는 것 보면 그러신 것 같네요.”
“말도 마세요. 그 친구 하는 일마다 잘 되지 않고 이런 저런 일로 어려우니까 자꾸 술을 찾네요. 운전하니까 그렇게 하지 말라는데도 말도 듣지 않아요!”
“신경 많이 쓰이시겠어요. 그리고 그 친구 분에게 기사님 같은 친구 분이 꼭 있어야 하겠어요! 곁에 있어서 이야기도 들어주고, 또 중요할 때는 낮 술 너무 많이 하지 말라고 말려주기도 해야 하니까요.”
그런 후 택시는 곧장 울퉁불퉁한 비포장도로로 들어섰습니다.
이제 그 분에게 비포장도로는 운전하기 불편하고 먼지가 나서 욕설이 쏟아지는 현장이 아니라 추억을 생각나게 하는 현장이었던 것 같습니다.
이 짧은 시간의 대화로 한 사람이 변했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상담자의 입장에서 볼 때 그렇게 빠르게, 그리고 그렇게 극적으로 언어가 달라지는 것은 매우 흥미로운 일이었습니다.
누구나 할 수 있는 이 대화를 분석해 보면 목회자나 교회 소그룹 지도자가 대화 중에 꼭 사용해야 할 몇 가지 요소들이 있습니다. 첫째는 이해와 공감의 말입니다. 공감이란 상대방의 입장에 서서 그 사람의 마음을 함께 느끼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가 어릴 때 아버지나 어머니의 신을 신어 보았을 때 느끼는 마음, “야, 아빠 발과 신이 크구나.” 하는 느낌을 가리킵니다.
그러므로 공감(empathy)이란 “감정의 상상력”이라 부를 수 있습니다. 내가 직접적으로 경험한 일들도 세상에는 많고, 또 다른 사람들과 전혀 다른 환경에서 살아가기 때문에 상상이 가지 않는 일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차이를 막론하고 건강한 하나님의 백성들과 목회자들은 다른 사람의 처지를 공감할 수 있습니다.
하루 종일 길에서 손님을 맞이하고 보내는 기사님에게 “하루 종일 운전하시기 힘드시죠? 그런 운전자들 보시면 화가 나시기도 하겠네요.”라고 말하면 보통 그런 분들은 “내 마음을 알아주는구나!”하는 것을 느끼게 될 것입니다.
잠언 25:15에서는 “오래 참으면 관원도 설득할 수 있나니 부드러운 혀는 뼈를 꺾느니라”고 말씀하였습니다. 공감의 말, 칭찬의 말, 따뜻한 격려의 말 몇 마디가 잠시나마 거친 야생의 영혼을 따뜻한 추억의 사람으로 만들 수 있었던 것입니다.
상담을 받는 여성들 가운데는 “저희 남편(혹은 시어머니)은 말을 참 아프게 해요.”라고 말씀하시는 분들이 있습니다. 성질을 이기지 못해 상대방이 아프도록 내지르는 말 한 마디 한 마디가 사람의 마음에 깊은 상처를 냅니다. 어떤 분은 10년이 지난 시누이의 말을 아프게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아니 우리 오빠가 어때서? 오빠가 그렇게 변한 건 언니 때문 아니에요? 남자는 여자하기 나름이잖아요!”
그런데 정작 이렇게 말을 뱉어버린 본인들은 자신의 말 때문에 누군가가 마음이 아프게 된다는 것을 전혀 모르는 것 같습니다.
특히 목회자나 지도자들의 말 한 마디는 성도들의 마음에 더 큰 흔적을 남깁니다. 그것이 따뜻한 사랑의 흔적이든, 아니면 아픈 상처의 흔적이든... 상대방의 마음에 대한 배려하는 마음으로 단어 하나하나를 의식적으로 선택하지 않는 한, 우리는 흔히 다른 사람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말들을 쉽게 하면서 산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이 분과 얘기하면 참 마음이 따뜻해 진다. 나를 이해해 주는 것 같아.”
목회 상담학자로서, 신학생을 가르치는 교수로서 저는 개인적으로 목회자나 교회 소그룹의 모든 지도자들이 성도들에게 이런 말을 들을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상상해 봅니다.
유학 생활 중 매우 힘들고 어려운 시기가 있었습니다. 공부를 계속해야 하나, 아니면 다른 곳에 가서 돈이라도 벌면서 우선 경제적인 문제를 해결해야 하나 고민하고 있었습니다. 그 때 박사과정을 지도해 주신 교수님의 한 마디가 큰 힘이 되었습니다.
“너와 너의 가족들을 생각하면 내 마음이 아프다!”(“My heart goes out to you and your family!")
사실 이 표현은 누가복음 7:13에서 예수님께 대하여 사용된 표현과 동일합니다. 거기에는 나인성 과부의 외아들 장례식 이야기가 등장합니다. 두 큰 무리가 서로 마주쳤습니다. 하나는 성에서 나오는 장례식의 무리들이고, 다른 하나는 예수님을 따르는 무리들입니다. 사람들이 많았고, 두 무리가 섞였을 때는 더 그랬을 것입니다.
그럴 때 예수님의 시선은 한 곳에 머물렀습니다.
그것은 거기에서 가장 마음이 아픈 사람이었습니다.
유복자가 아니었다면 남편이 죽었을 때는 틀림없이 이 아들을 붙들고 울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는 붙들고 함께 울 수 있는 핏줄이 없습니다. 하나 남은 소망의 촛불까지 꺼지고 아들을 잃은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 아픈 마음을 가진 여성만 바라보셨습니다. 그리고 그녀를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눅7:13, When the Lord saw her. his heart went out to her, NIV)
예수님의 모든 사역은 어쩌면 예수님의 심장에서 시작되었는지도 모릅니다. 우리 목회자들과 소그룹 리더들의 사역은 예수님의 심장을 이식받는 일로부터 시작해야 하지 않을까요? 정말 긍휼히 여겨야 할 한 영혼에게 심장이 나갈 만큼 따뜻한 긍휼 말입니다.
때로 소그룹 리더들로부터, 혹은 목회자들로부터 듣는 이야기는, “힘든 일 꺼내면 분위기 무거워지니까 무조건 긍정적인 이야기만 하게 한다.”는 것입니다. 물론 그것도 한 방법일 것입니다. 하지만 상대방의 마음을 조금만 이해해 주고 인내해 줄 수 있는 여유가 있다면 교회나 소그룹은 천국의 치유를 경험하는 좋은 치료의 장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 이유는 분명합니다. 교회 소그룹 대화의 목적은 문제를 풀어주는 것이 목적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문제를 풀어주려 덤비면 더 깊이 말려들 수밖에 없습니다. 제가 상담을 할 때도 가장 우선적으로 생각하는 것은 사람을 세워주는 것입니다. 상담이나 대화를 잘 한다고 해서 자녀 문제나 부부의 문제가 저절로 풀리지 않습니다.
그러나 따뜻한 마음을 가진 누군가가 그 사람들의 이야기를 잘 들어주고, 마음으로 이해해 주면, 문제는 여전히 있지만 사람과 태도가 달라집니다. 그렇게 사람이 달라지면 어느새 자신의 몸에서 떨어져 나와 있고, 문제의 사이즈도 처음보다 훨씬 작은 덩어리가 돼 있기 때문입니다! 신비롭게도 힘든 이야기라도 믿을 만한 그 누군가와 함께 나누는 순간, 그 문제는 본래의 파괴력을 상실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정말 한 영혼을 공감하고 이해할 준비가 되셨습니까? 그렇다면 다음에 나오는 [25세 청년 김정민 이야기]를 읽으시면서 자신 속에 어떤 마음이 떠오르는지 한 번 점검해 보십시오.
서울은 크고 부유하고 활기가 넘치는 도시입니다. 온갖 상품들과 번쩍이는 새 차들로 거리가 가득합니다. 잘 사는 사람들은 극장과 값비싼 식당을 찾아서 북적댑니다. 거기에 김정민이라는 25세의 청년이 있습니다. 그다지 미래가 있을 것 같지 않아 보이는 가난하고 외로운 청년입니다. 지방에서 고등학교를 중퇴하고 군대에 갔다 왔지만 할머니처럼 보이는 어머니와 농사하는 것이 답답하여 무턱대고 서울에 올라 왔습니다. 마땅히 갈 곳이 없습니다. 가끔 편의점이나 짜장면 배달하는 일을 하지만 성격이 원만하지 않아 그다지 오래 가지는 않습니다. 얼마 전에는 서울역에서 서성대다가 편의점 물건을 훔친 죄로 경찰의 불심검문에 걸려 체포되었습니다. 판사는 그에게 10만원의 벌금형을 내렸습니다. 그런데 김정민에게는 벌금 10만원을 낼 돈이 없었습니다. 그리하여 보호 감호소에서 한 달간 노동을 하며 벌금을 지불해야 했습니다.
한 달이 지나 아침 9시에 출소한 김정민은 오후 1시 30분이 되어 가까이에 있던 7층 건물 옥상에 올라가 자살소동을 벌였습니다. 소방관들이 와서 설득했지만 막무가내였고, 건물에서 뛰어내렸을 때 가까스로 소방관의 그물에 걸려 목숨은 구했습니다. 엉덩이의 뼈가 부스러지고 폐에 출혈이 생겼으며, 갈비뼈는 부러지고, 심각한 다른 부상들을 입었습니다. 그가 뛰어내리기 직전에 주변에 모여 있던 사람들 가운데 한 목회자가 김정민에게 “하나님은 김정민씨를 사랑하십니다.”라고 외쳤습니다. 김정민이 물었습니다. “어떤 하나님(What God?)에 대해 말하는 겁니까?” 그에 대해 아무도 대답하는 이가 없었습니다.
만일 여러분이 현장에서 이 상황을 목격하고 있었다면 어떤 말을 해 줄 수 있었을까요? 이 긴급한 상황에서 어떤 말로 이런 사람을 구해줄 수 있을까요?
사실은 이 이야기에 정답은 없습니다. 하지만 최소한 이 이야기를 읽으면서 함께 안타까워하고, 또 뭔가 해 주고는 싶지만 그렇게 하지 못하는 답답한 마음을 느끼셨다면, 저는 그것만으로도 여러분은 한 영혼을 돌볼 수 있는 사역자의 중요한 자질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진정 목회적인 마음가짐을 가지는 것은 어떻게 당사자의 문제를 풀어주느냐에 있는 것이 아니라, 안타까운 가운데 함께 어찌할 바를 모르고 고민하는 모습 그 자체이기 때문입니다.
예일대학교의 상담학 교수였던 제임스 디터스(James Dittes)는 “따뜻한 이해와 공감의 마음으로 다른 사람의 감정이 표현되도록 돕는 것이 곧 치유의 행위”라고 말하였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것을 지나쳐서 상대방의 모든 문제를 다 풀어 주어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사로잡히기 쉽습니다.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저는 학생들을 훈련시킬 때도 그렇게 요청합니다. “문제를 먼저 파고들려 하지 말고, 그 사람의 마음이 어떤지 계속 집중하라”고 말입니다.
하지만 이것이 그렇게 생각만큼 쉽지 않다는 것을 발견하였습니다. 왜냐하면 머리로는 인식을 하고 있어도 정작 대화를 시켜보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문제를 따라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문제에 대해 고민하지 말라는 뜻이 아닙니다. 함께 고민해야 하고, 가능한 어떤 방법이나 자원이 있는지 살펴보고, 모든 가능성들을 테이블 위에 올려놓아야 할 때가 옵니다. 하지만 우선 중요한 것은 사람의 마음이 어떤지 살피면서 공감하는 것이 우선입니다.
우선 다음의 말들을 먼저 소리를 내어 연습해 보십시오. 이런 상황을 상상하시면서 한 마디씩 해 보시고, 실제 만남에서 연습해 보십시오.
“많이 놀라셨겠어요!”
“당황스럽지 않으셨어요?”
“일이 그렇게 되어 힘드셨을 것 같아요.”
“정말 좋으셨겠습니다!”
반드시 정확한 감정을 찾아낼 필요는 없습니다. 그러나 너른 개울에 투망을 던지면 흩어져 다니는 물고기를 잡을 수 있는 것처럼, 상대방에 대한 마음을 집중해서 보고 있으면 이런 공감의 말들을 얼마든지 찾아내어 표현해 줄 수 있습니다.
교회에서 심방이나 상담을 해 보신 분들은 이해하시겠지만 모든 문제 해결의 자원은 당사자에게서부터 옵니다. 물론 그런 자원은 하나님이 주신 것임에 분명합니다. 목회자나 소그룹 지도자들은 그런 분들을 붙들어주고 세워주는 역할을 할 뿐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새 나무를 심는 것 이상으로 매우 중요한 지지대의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많은 목회자들이나 교회 소그룹 지도자들은 대답하기 어려운 경우들을 만날까봐, 혹은 당황스러운 일이 생길까봐 다른 사람들이 마음을 놓고 이야기할 수 있는 환경 자체를 두려워합니다.
혹은 그런 상황에 말려드는 것이 두려워, 급하게 말씀 한 절, 기도 한 번 하고는 그 자리를 피하려고 합니다. 하지만 조금만 인내하면서 당황스러움을 견디고, 마음으로 함께 해 준다면, 그리고 귀 기울여 마음의 소리를 들어주려 한다면, 교회나 소그룹 모두 따뜻하고 포용적이며 안전한 “푸른 풀밭, 맑은 시냇물가”가 될 것입니다.
선지동산 61호 게재 / 목회적대화(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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