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기고글] 사랑이 변화시킨다 - 하재성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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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이 변화시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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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 폭력의 가해자인 중학생 한 명을 상담한 적이 있었다. 가출한 다른 아이들과 어울리면서 약한 아이들을 때리기도 하고, 그 아이들의 물품을 갈취하였다. 심지어는 자신도 그 무리의 아이들에게 이용당하여 자기 부모님의 패물을 빼앗기기도 하였다. 다급해진 부모는 여러 가지 가능성을 상담자와 더불어 타진하였다. 동남아시아 쪽으로 조기유학을 보낼까 생각도 하고 있었다. 상담자는 절대 만류하였다. 아이를 정말 잃고 싶다면 그렇게 해도 좋겠다고 말했다. 부모님과 가까이 있을 때에도 이렇게 통제가 되지 않는다면 부모가 없는 곳에서 어떻게 스스로 마음을 잡고 자기 일에 집중할 수 있겠는가? 그 부모는 이사를 결심하였다. 지금 사는 곳으로부터 한 시간 이상 떨어진 곳으로 이사를 가서, 학교를 옮기고 새롭게 시작하겠다는 것이었다. 쉽지 않은 결정이었지만 그것은 그나마 실제적인 하나의 대안이 되었다. 무엇보다도 상담자가 칭찬했던 중요한 결정의 하나는 엄마가 그런 아들 때문에 수년간 일해 오던 병원 일을 접고 오직 아이의 양육을 위해 전념하겠다는 것이었다. 물론 아이 때문에 부모가 하던 일을 그만두는 것이 모든 사람들에게 해당하는 결정이라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이 아이의 어머니에게 있어서 그것은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의 사랑의 표현이었고, 그것은 그 가정에 새로운 변화를 가져왔다. 그래서 아동발달을 연구하는 학자들은 한 아이가 청소년기를 건강하게 지내기 위해서는 적어도 한 사람의 부모가 그 아이를 위해 미칠 정도로 사랑해야 한다고 말한다. 지난 20여년 간 몇몇 종교심리학자들이 (Lee A. Kirkpatrick & Philip R. Shaver) 청소년의 회심 체험에 대한 매우 흥미로운 연구 결과를 발표하였다. 청소년기에 갑작스럽게 기독교 신앙으로 개종하는 많은 아이들 가운데는 어린 유아기에 부모의 애착을 경험하지 못한 아이들이 많다는 결론이었다. 하나님의 사랑을 접하였을 때, 그 사랑을 경험하지 못한 아이들은 매우 빠르게 복음에 반응한다는 것이었다. 거꾸로 부모의 사랑을 많이 받으면서 자란 아이들은 그 부모가 가진 신앙을 조용히 내면화시키고, 큰 회심의 경험 없이도 신앙적인 가치를 물려받는다는 것이었다. 이 연구는 우리에게 중요한 교훈을 주고 있다. 첫째는 세상의 가족들에게 어려움이 많을 때 교회의 역할은 더욱 중요해진다는 것이다. 사랑이 결핍된 환경에서 자란 아이들에게 그리스도의 사랑의 복음을 전하는 것은 그들에게 회심의 경험을 통해 하나님의 사랑을 알게 하는 통로가 된다는 것이다. 우리가 가진 그리스도의 복음에는 엄청난 사랑의 자원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세상 가정의 위기는 교회의 기회이자 사명임을 기억해야 한다. 둘째, 자녀에 대한 부모의 진실한 사랑은 부모가 가진 소중한 신앙의 가치를 다음 세대로 전달하는 견고한 통로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신앙생활을 “너무나 잘 하는 부모”가 만일 아이들을 인격적으로 사랑할 줄 모른다면, 신앙에 대한 부모의 강요는 외려 자녀들의 믿음을 방해할 수도 있다. 심지어 어떤 아이들은 “엄마가 가는 천국에 나는 가고 싶지 않다”고 말한다. 하지만 아이들을 인격적으로 사랑하고 소통하며, 아이들의 마음에 귀를 기울이는 부모가 있다면 그들의 자녀들은 부모가 가진 신앙적 가치관을 고스란히 흡수하고 내면화하게 될 것이다. 오늘날 많은 부모들은 청소년 자녀들의 행동이나 성장에 대해 거의 포기한 상태에 있다. “이젠 자기가 알아서 하겠죠. 부모가 뭘 할 수 있겠어요?” 이런 말은 경험이나 삶의 철학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부모로서의 무기력에서 비롯된 것이다. “모든 일을 주께 맡기라고 했는데, 가족이나 자녀는 주님께 맡기고 나는 주님의 일이나 열심히 하렵니다!” 매우 신앙적인 것처럼 들리지만 그렇지 않다. 하나님께서는 부모에게 자녀의 양육을 맡기셨는데, 부모는 자녀를 하나님께 떠맡기는 형국이다. 이것은 신앙이나 사랑이 아니라 무책임이다. 무기력감을 느끼는 부모들 가운데는 아이들을 무조건 꺾어 놓으려고 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것은 자신감의 표현이라기보다는 두려움의 결과이다. 학교 폭력에 대응하는 사회의 분위기도 그렇다. 물론 폭력을 행사하는 아이들에게 규칙과 법을 반드시 가르쳐야 한다. 그러나 그것이 사람의 마음을 바꾸기는 어렵다. 억지로 꺾으려 할수록 그에 대한 저항은 커지기 마련이다. 힘과 힘이 부딪치면 승자와 패자가 갈라질 수는 있겠지만 사람은 변화하지 않는다. 예수님은 인간이 어떻게 변화하는지 너무나 잘 아셨다. 삶의 자원을 탕진하고 소진한 탕자의 변화를 위해 채찍 대신 아버지의 너그러운 품이 필요한 것을 아셨다. 자신의 탐욕으로 삶을 불살라 온 삭개오의 변화를 위해 주님은 너그럽게 그를 받아 주셨다. 좌충우돌하며 주님을 부인하기까지 했던 베드로의 변화를 위해 주님은 끝까지 인내하시며 기다려주시고, 새로운 기회를 주셨다. 그렇다고 부모가 무기력하게 모든 것을 잃어서도 안된다고 말한다. 실천신학과 목회신학의 세계적인 권위자인 밀러-맥리무어(Miller-McLemore)교수는 부모가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권위를 아이들 위에 가지고 있어야 한다고 한다. 그러나 그것은 큰 목소리가 아니라 외려 낮은 목소리에서 오는 권위이다. 부모의 목소리가 커질수록 자녀들의 목소리도 높아지고, 기가 죽을지는 모르지만 변하지는 않는다. 자녀를 사랑하는 부모는 아이의 말에 경청하고, 아이를 가르치기 전에 아이의 형편을 먼저 살핀다. 규칙만을 강요하거나 높은 성적만 요구하는 일방적인 부모가 아니라, 낮은 목소리로 규칙의 의미를 설명해 주고, 어떤 일이 있어도 자신은 자녀의 편이라는 것을 확인시켜주는 부모이다. 자녀를 변화시키는 것은 사랑이며, 사랑의 모양은 경청이다. 새로운 교회에서 사역을 시작하는 많은 목회자들은 목회에서의 비전과 꿈을 성취하고자 하는 열정과 사명감으로 충만하다. 하지만 그들 가운데는 실패하는 목회자들이 많다. 그들은 교회나 교인의 사정을 경청하기 전에 자신이 원하는 대로 교회나 사람들을 바꾸어 보려고 시도하다가 결국 두 손을 들고 만다. 열정이 넘치다보니 교회 어른들의 지혜와 삶에 대해 경청할 여유를 갖지 못한 채 젊은 사람들과만 호흡하려다 사람들의 마음을 잃어버린다. 사랑의 소통보다는 힘으로 사람들을 누르고 일방적인 통제권을 잡으려 하다가 실패하고 만다. 건강한 목회자는 먼저 성도들의 목소리를 판단 없이 들을 수 있어야 한다. 교회에 있는 연세 드신 어른들의 수고와 땀과 눈물과 교회 사랑의 마음을 거듭 듣고 감사하며 사람들 앞에서 그 의미를 되새기며 축복할 수 있어야 한다. 그리스도 안에서의 인격적인 사랑과 신뢰 없이 일 우선, 일방적인 소통을 우선시 하는 것은 지혜가 없는 어리석은 부모 혹은 부모의 자화상이다. 성령님은 온유하시면서도 하나님의 자녀들의 형편을 살펴 그 사람들을 감동시키시면서 그들 스스로 일을 하게 도우신다. 하지만 악령은 사람의 형편을 생각하지 않고 자기 맘대로 사람을 휘두르거나 이용할 뿐이다. 인격적인 사랑의 소통은 성령의 방법이지만, 자신의 결핍을 자녀나 성도를 통해 충족시키려는 이기적인 행동은 사단적이다. 오직 사랑만이 사람을 변화시킬 수 있고, 사랑의 모양은 존중과 경청이다. 오직 사랑의 통로를 통해 우리는 믿음을 다음 세대에 전달시킬 수 있고, 사랑의 환경을 통해 한 영혼을 변화시킬 수 있다.선지동산 62호 게재 / 목회적대화(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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