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기고글] 예수님과 삭개오 - 길성남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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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과 삭개오
선지동산 36호 게재 / 성경본문 바로읽기(4) / 길성남 교수
성경을 읽는 사람 열 명 가운데 여덟, 아홉은 역사적 사건을 기술하는 본문이나 이야기체 본문을 인간중심적 관점에서 읽고 모범적으로 적용합니다. 다시 말해서 본문에서 하나님(또는 예수님이나 성령님)보다 사람을 주목하고 사람의 행동을 자신의 삶을 위한 모범으로 삼는다는 것입니다. 물론 이런 식으로 본문을 읽고 적용하는 것도 성도들에게 도전이 되고 믿음 생활에 유익을 줍니다. 신약성경의 기자들도 구약의 사건이나 인물들을 모범으로 제시하기도 합니다. 예컨대, 히브리서 기자는 11장에서 구약의 많은 신앙의 위인들을 믿음의 모범으로 제시합니다. 또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10장에서 광야의 이스라엘 백성들의 죄를 고린도교회 성도들이 따라서는 안 되는 실례로 제시합니다. 성경 본문에 등장하는 사람(들)에 주목하고 사람(들)의 행동을 모범적으로 적용하는 것 자체가 비성경적인 것은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러나 성경 본문을 지나치게 인간중심적 관점에서 읽고 모범적으로 적용한 나머지 저자의 본래 의도를 가볍게 취급하고 본문에 등장하는 하나님을 무시한다면, 그것은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오늘날 한국교회의 강단과 성도들의 삶에 지나친 인간중심적 본문읽기와 모범적 적용이 성행하고 있습니다. 지나친 인간중심적 본문읽기와 모범적 적용의 가장 큰 병폐는, 본문의 주인공인 하나님을 보지 못하게 만들고 성경기자, 또는 하나님께서 본문을 통해 전달하시려는 말씀을 듣지 못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성경 본문을 통해 하나님을 만나야 하고 하나님의 음성을 들어야 하는데 그저 사람과 사람의 행동에만 주목하니 어떻게 진정한 삶의 변화와 영적 성장이 일어나겠습니까?
누가복음 19장에 등장하는 유명한 삭개오 본문(1-10절)을 실례로 삼아 지나친 인간중심적 본문읽기와 모범적 적용의 문제를 지적하고, 아울러 저자의 의도에 맞는 올바른 본문읽기를 시도해보겠습니다. 삭개오는 동족들에게 죄인 취급을 받았지만, 상당수의 세리들을 휘하에 거느린 지체 높은 세리장이었고 남부러울 것이 없는 큰 부자였습니다. 그런데 그는 예수님을 보기 위해 ‘뽕나무’(사실은 돌 무화과나무)에 올라갔습니다. 그는 세리장이라는 사회적 신분과 체면, 그리고 부자의 오만함을 헌 신발짝처럼 벗어던졌습니다. 키가 작은데다가 높은 신분과 부유한 환경 탓에 몸도 비대했을 삭개오가 나무에 기어 올라가는 모습을 상상해보십시오. 그의 모습을 보고 손가락질하며 조롱하는 사람들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아랑곳하지 않았습니다. 왜요? 예수님을 만나야 했기 때문입니다. 나무에 올라간 삭개오는 예수님의 시선을 사로잡았고, 결국 예수님을 만나 삶이 변화되었습니다!
본문에 나타난 삭개오의 이런 모습은 그리스도를 만나기 원하는 사람들은 물론 이미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에게도 상당한 도전이 됩니다. 특히 교회에 출석하면서도 아직 예수님을 만나지 못한 사람들을 위한 훌륭한 모범이 됩니다. 설교자들은 이렇게 도전합니다. “예수님을 만나기 원하십니까? 삭개오를 보십시오. 삭개오처럼 사회적 신분과 체면, 자존심을 버리고 적극적으로 예수님을 찾으십시오. 간절히 부르짖고 또 부르짖으십시오. 여러분도 마침내 예수님을 만나게 될 것이고, 여러분의 삶도 변화될 것입니다.” 사회적 신분이나 인간적 자존심을 버리고 예수님을 만나기 위해 간절히 기도하고 부르짖는 자세를 갖는 것은 반드시 필요한 일입니다. 하나님께서도 “너희가 전심으로 나를 찾고 찾으면 나를 만나리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렘 29:13).
그러나 이런 식으로 본문을 읽으면 복음서 기자가 의도한 것을 놓칠 수밖에 없습니다. 누가가 이 본문을 기록한 목적이 무엇입니까? 예수님을 만나기 위해 삭개오가 얼마나 애를 썼는지를 보여주는 것입니까? 삭개오라는 개인의 사례를 통해 독자들에게 예수님을 만나기 위한 비결을 알려주는 것입니까? 물론 본문에서 누가는 삭개오의 행동을 중요하게 취급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삭개오가 예수님을 만난 사건을 통해 복음서 기자가 독자들에게 주고자 한 교훈이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만나려면 모든 겉치레와 체면과 자존심을 버리고 적극적으로 예수님을 찾아야 한다는 것입니까?
본문을 다시 한 번 읽어보십시오. 이 본문을 대할 때마다 우리 눈을 사로잡는 삭개오라는 인물에서 잠시 눈을 떼고 본문 전체를 열린 자세로 차근차근 읽어보십시오. 본문이 어떻게 시작되고 있습니까? 또 어떻게 끝이 나고 있습니까? 예수께서 여리고로 들어오시는 장면으로 본문이 시작되며, 예수님의 선언으로 본문이 끝납니다. 특히 마지막 선언에 주목하십시오. “인자의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10절). 모든 주석가들이 지적하는 대로, 이것이 바로 누가복음의 요절입니다. 누가는 자신의 복음서에서 예수님을 잃어버린 자들을 찾아 구원하시는 분으로 제시합니다. 그래서 누가복음을 ‘잃어버린 자들을 위한 복음서’라고 하는 것입니다. 본 단락에서도 누가는 예수님을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시는 분으로 제시합니다. 삭개오는 잃어버린 자를 대표하는 인물입니다. 그는 잃은 양을 찾아 나선 참 목자 예수께서 찾으시는 대상, 곧 잃은 양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본문에서 누가의 일차적인 목적은 삭개오가 어떤 노력 끝에 예수님을 만났는가를 보여주는데 있지 않습니다. 예수께서 어떻게 삭개오를 찾아오셨으며, 어떻게 그를 만나셨으며, 어떻게 그를 구원하셨는가를 보여주는데 그의 일차적인 목적이 있습니다.
예수께서는 삭개오가 거주하는 여리고에 들어오시기 전에 이미 그의 이름을 아셨고, 그가 나무에 올라가기 전부터 그를 찾으셨습니다. 예수께서는 삭개오가 예수님을 부르기 전에 나무에 올라간 그를 우러러 보시고 먼저 그의 이름을 부르셨습니다(5절). 또 삭개오가 초청을 하기도 전에 “내가 오늘 네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5절). 삭개오가 아니라 예수님이 주도권을 쥐고 행동하시는 것입니다. 이윽고 본문의 사건은 절정에 도달합니다. 9절에서 예수께서 이렇게 선언하십니다.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으니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임이로다!” 잃어버린 자의 대표 격에 해당하는 삭개오를 찾아 구원하심으로써 예수님은 자신이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기 위해 세상에 오신 분임을 분명히 보여주시는 것입니다(10절).
이처럼 삭개오가 아니라 예수님께 초점을 맞추어 읽고,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러 오신 예수님을 새롭게 인식하는 것이 이 본문을 올바르게 읽는 방식입니다. 삭개오와 그의 행동에 초점을 맞추다보면 삭개오의 모습만 부각되고, 죄인들을 찾아 구원하러 오신 예수님의 모습은 희미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예수님을 주목하고 그를 만나기를 원하시는데, 자꾸 사람만 보려 한다면 하나님께서 얼마나 안타까워하시겠습니까? 본문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믿음이나 순종은 우리에게 도전을 줄지 모르나, 삼위 하나님을 알아가고 그를 새롭게 만날 수 있게 하지는 못합니다. 심지어 인간중심적 본문읽기와 모범적 적용은 본문을 통해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데 커다란 장애물이 되기도 합니다. 결론적으로, 우리는 역사적 사건을 기술하는 본문이나 이야기체 본문을 인간중심적 관점이 아니라 하나님 중심적 관점에서 읽어야 합니다. 설교자들부터 인간중심적 본문읽기를 지양하고, 성경 본문을 하나님 중심적으로 읽고 가르침으로써 성도들이 성경본문을 통해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게 해야 할 것입니다. 이것이야 말로 하나님께서 설교자들을 세우신 가장 중요한 목적이라는 사실을 결코 잊지 마십시오. (다음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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