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기고글] 어떤 교회를 세울 것인가? - 이신철 교수
페이지 정보
본문
선교책무⑧
어떤 교회를 세울 것인가?
이신철 교수(선교학)
선교의 전략에 있어서 가장 핵심에 해당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를 세우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그의 사도들에게 ‘제자를 삼으라’고 분부하셨는데, 그 명령을 책임지고 감당하기 위해서는 교회가 필요하다. 예수님을 믿는 자들에게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환영하는 주체가 교회이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 성경 전권에 나타나 있는 하나님의 구원의 경륜을 풀어서 가르쳐 주신대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고 증거하고 그 주님의 말씀대로 순종하여 살도록 돌보고 다스리는 사역을 맡은 주체도 교회이다. 이처럼 주님의 명령대로 그의 참된 제자를 양육하는 것이 교회가 존재하는 이유이다. 아무 교회나 다 주님께서 세우시는 교회가 아니다. 성경을 바로 가르치고, 신앙을 바로 고백하고, 주님을 삶으로 바로 증거하는 교회를 세워야 한다. 우리는 이런 성경적 교회를 세우기를 원한다.
이 성경적 교회를 다른 말로 하자면, 우리는 개혁주의 교회를 건설하기를 원한다. 따라서 개혁주의 교회는 개혁주의 신학과 개혁주의 신앙고백과 개혁주의 삶의 증거가 살아 있는 교회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우리가 믿고 고백하는 바대로의 교회를 세워하고 있는가? 이것이야말로 선교책무에 있어서 가장 치밀하게 검토해야 할 중요한 부분이라고 생각한다.
이러한 개혁주의 교회를 설립하기 위해서 우리는 구체적으로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가? 한국장로교회의 회복을 위하여 무엇보다도 개혁주의 신학의 정립이 절실하였고, 그 신학에 따른 목회자의 양성이 절실하여 고려신학교를 설립하였다. 우리 선배들의 혜안이 여기에서 빛을 발한다. 하나님의 교회는 교회제도를 복원시킨다고 해서 바로 세워지는 것이 아니고, 신학 정립과 진실한 목회자의 양성이 무엇보다도 우선한다는 것을 직시한 것이다. 이 확신을 따라 우리 교회는 하나님의 말씀을 바로 이해하고 바로 가르치기 위한 기초로서의 개혁주의 신학의 공유를 위하여 거의 70년에 가까운 세월을 보내었다고 생각한다. 그 공유의 정도가 서로 다른 문제가 없지는 않지만, 고려신학대학원이 개혁주의 신학의 중심을 지켜왔고, 앞으로도 지켜나가야 할 것이라고 본다.
그런데 이렇게 바른 개혁주의 신학을 정립하기 위해서 추구해 오는 동안에 우리 교회들은 어떻게 되어 갔는가? 목사와 당회가 한 마음이 되어 개혁주의 신학과 신앙고백을 따라 개혁주의 교회를 세우기 위하여 일관성있는 목회적 실천을 하고 있는가? 이제 신학이 정립되었으니 그 신학에 맞는 교회를 세워가고 있는지 심각하게 되짚어보지 않을 수 없다. 우리가 정말 신학적으로 개혁주의 교회를 세움이 합당하다고 생각한다면, 개혁주의 교회를 가장 잘 구현해 낼 수 있는 교회정치제도에 대한 확인 또는 재정립의 과정이 필요하다. 개혁주의는 신학과 교리를 성경으로 재정립하는 일 뿐 아니라, 교회의 생활과 치리를 그 신학과 교리에 맞게 실천하는 것을 포함한다. 개혁주의 신학의 교회적 실천을 위해서 교회의 정치제도가 확립되어야 하는데, 스코틀랜드 장로교회 외에도 대부분의 개혁 교회들은 이를 위하여 장로회적 교회제도를 채택한 것이다. 개혁주의 교회의 실천을 위한 교회적 장치는 장로회적 교회를 형성함에 있다고 할 수 있다. 해방 이후 개혁주의 신학과 신앙고백에 익숙하지 못한 채 장로교회의 정치제도 더 익숙했던 교회를 회복함에 있어서 개혁주의 신학과 신앙고백의 정립에 힘을 쏟고자 한 것은 바른 방향이었으나, 이제 개혁주의 신학과 신앙고백의 교회적 실천을 위해서 장로회적 교회정치제도의 재정립이 다시 병행되도록 해야 한다. 신학은 좋으나 교회는 혼란스럽다는 느낌을 그냥 예사로 덮어버리면 안 된다. 교회의 생활이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정립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장로교회는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교회를 세우기 위해서 강단의 설교자인 목사를 귀중하게 생각한다. 아무나 설교를 하게 하지 않고 설교할 수 있는 성경적 신학적 교육과 훈련을 받은 사람을 노회가 심사하여 안수하되 교회의 청빙을 받아야 목사로서 사역할 수 있게 하고 있다. 개체교회는 목사 한 사람에 의해서 독점적으로 다스려지지 않게 하지 않고, 치리장로들을 선출하여 노회가 안수함으로 목사와 함께 당회를 구성하여 오직 하나님의 말씀대로 교회를 돌보고 다스리게 하고 있다. 특히 장로들은 성도들이 신앙생활에서 기록된 말씀 뿐 아니라, 강론된 말씀을 따라 순종하는지를 살피며, 성도들의 형편을 부지런히 살펴서 어느 누구도 은혜에서 떨어지는 자가 없도록 하려고 하였다. 이런 개혁주의적이면서도 장로회적인 교회를 세우려고 하는 분명한 목표의식이 선교사들과 교회 개척사역자들에게 장착되어야 한다. 그러나 개혁주의 장로교회는 선교지의 교회들과 개척교회들이 처음부터 그런 교회로 자랄 수 있도록 기초를 놓아주고, 성장의 과정을 돌보아주며, 그런 교회가 되었는지를 평가하는 책임을 선교사나 개척사역자 한 사람에게 맡겨 놓고 방치해서는 안 된다. 현지의 교회개척의 책임을 초기에는 혹 선교사 개인이 맡는다 하더라도 현지선교부가 조직된 이후에는 개척교회들이 체계적으로 개혁주의적 장로교회로 설립되도록 그 과정을 관리해야 한다. 이런 일에 대한 책무의식이 분명하지 못한 현지선교부는 거저 선교사들 간의 친교나 챙기는 수준을 벗어나지 못할 것이고, 설립되는 교회들이 개혁주의적 장로회적 교회의 맛을 보지도 못한 채 나중에 교정이 불가능한 상태의 교회로 남게 될 지도 모른다. 고신 세계선교부는 선교사의 교육과 선발, 그리고 지역선교부의 재편성 등의 체계적인 발전을 거듭하고 있음은 정말 고무적인 일이다. 하지만 선교현지에 개혁주의적 장로회적 교회를 세우고자 하는 이 목표에 좀 더 치열하게 다가가게 되기를 소망한다.
국내에서 개혁주의적 장로회적 교회를 세워가는 일을 바로 잡아 나갈 수 있는 가장 중요한 핵심전략은 기존의 교회들의 의식을 새롭게 하여 기존교회에도 적용시키겠지만, 무엇보다 교회개척의 현장에서 그런 교회를 세우는 일을 처음부터 구체적으로 실천하는 데 있다고 생각한다. 교회개척은 분명히 개인의 일이 아니고 교회의 일이다. 장로회로서 한 개체교회의 당회의 일이 아니고, 장로회로서 한 노회의 일이다. 한 개체교회가 하나의 개척교회를 단독으로 시작하고자 하더라도 노회와 의논을 거친 후에 노회의 위임을 받고 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고신 교회의 헌법은 이 부분에 대해서 대단히 유감스러운 항목을 갖고 있다. 이 항목은 과연 노회가 개혁주의적 장로회적 교회를 개척하고자 하는 책무의식이 있는지를 심히 의심하게 만든다. “1. 동일한 노회지역의 개척교회는 그 교회를 개척한 교회가 관리하고, 교회설립 허락을 받은 후에는 노회에서 관리한다. 2. 다른 노회 지역 내의 개척교회 관리는 1항에 준한다. 단 교회설립 허락은 개척교회 소속 지역노회에 한한다.”(헌법 교회정치 제2장 제16조) 노회지역이든 다른 노회지역이든 개척교회의 관리는 “그 교회를 개척한 교회”가 관리하고, 노회는 그 개척교회가 교회설립허락을 받은 후부터 관리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개척교회의 관리를 모교회에 다 맡긴 조항이다. 그러나 실제로 모교회가 교회를 개척하는 경우가 얼마나 있나? 책임져 주는 모교회가 없이 시작된 개척교회는 노회가 관리하지 않기로 했으니, 결국 개척사역자 혼자서 다 알아서 하도록 방치해 놓는 꼴이 되고 말았다. 그리고 개척교회의 목사를 노회가 전도목사로 파송하지 않고 무임목사로 보는 노회들도 있다고 하니, 이것은 노회가 개척교회를 돌아보기를 거부한 것이나 다름없다. 개척교회가 노회 설립허락을 받으려면 장년교인이 20명 이상이 되어야 하니(헌법 교회정치 제2장 제14조 2), 그때까지 노회는 그 개척교회들이 살아남기만을 바라는 매우 소극적인 태도를 법으로 인정한 것이 아닌가? 이렇게 해서는 우리 교회가 개혁주의적 장로회적 교회를 세우고자 하는 가장 최고의 기회들을 거의 버렸다는 비판을 면하기 어려울 것이다. 개혁주의적 장로회적 교회를 세우는 이 중차대한 사역을 선교사 개인이나 개척사역자 개인에게 거의 치외법권적 영역으로 방치하는 것은 분명히 장로회적 교회정치는 아닐 것이다.
따라서 어떤 교회를 세울 것인가 라는 질문을 받게 될 때에 ‘건강한 교회’라든지, ‘행복한 교회’라든지, ‘자립하는 교회’라는 표현은 누구나 다 동의할 수 있는 표어는 될 수 있어도, 교회가 하나님의 말씀대로 이루어져야 한다는 대 명제 앞에 그 내용이 별로 담기지 않고 너무 추상적이라고 생각한다. 신학적 정체성도 흐릿하고, 교회의 정치제도도 분명하지 않은 표현은 우리의 교회적 혼돈을 덮기에 좋을지 몰라도, 하나님이 원하시는 교회를 세워야 한다는 선교적 책무의식을 담아내지는 못한다고 본다.
세월호의 참극이 선원들이나 해경의 구조 책무의 방기 또는 유기에 있다고 하지만, 그 배후에 청해진 해운과 그 회사 배후의 실소유주들, 그리고 해운 교통의 감독기관들과 정부에게까지 그 책무의식을 따질 수밖에 없는 상황들을 보면서, 우리 교회의 교회설립에 대한 책무의식을 뼈아프게 반성하는 기회로 삼아야 할 것이다. 우리는 어떤 교회를 세우고자 하는가? 우리는 그 책무를 다 하고 있는가?
66호 선지동산 게재.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