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기고글] 성탄 전문점과 실천신학 - 하재성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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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탄 전문점과 실천신학
하재성 교수(실천신학)
벌써 연말과 성탄절을 준비하면서 교회들마다 어떻게 이 복된 계절을 소외되거나 가난한 이웃들과 나눌 수 있을까 생각하며 따뜻한 나눔을 계획하고 있을 것이다. 안식년을 보내면서 가족들과 함께 출석하고 있는 한 미국인 교회에서는 성탄절 나눔을 주제로, 가난한 이웃들을 위해 [성탄 전문점] (the Christmas Shoppe)을 운영하고 있다. 성도들이 기부한 상품들을 모아 진열하고, 교회에서 선택한 가난한 가족들(약 50가정의 200여명 가족)에게 일반 마트와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저렴한 가격에, 성탄절 선물과 상품들을 구입하도록 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 가족들은 보통 가게에서 제 값을 주고 선물을 살 수 있는 능력이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왜 거저 주지 않고 돈을 받고 파는가? 이전에는 이 교회에서도 그렇게 해 왔다. “한 가족 입양”이라는 프로그램을 통해서 가난한 가족들에게 직접 선물들을 전달해 온 것이다. 이렇게 교회가 구제와 나눔의 방향을 바꾼 이유는 한 가지이다. 그것은 “선물 그 이상”을 나누어 주어야 한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여기서 말하는 ‘선물 그 이상’이란 가난한 이들의 “품위(dignity)”와 당사자들의 기여와 참여를 말한다.
교회가 이런 행사를 해 오면서 만난 문제 가운데 하나는, 선물을 일방적으로 나누어줄 때 가난한 가족들은 점점 더 교회와 선물에 의존하게 된다는 것이었다. 결국 선물을 주는 선한 일을 하고서도, 외려 상대방에게 어려움을 끼치는 결과를 초래한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제 교회 성도들이 그들을 위해 선물한 것을, 적은 가격이나마 받고, 해당 당사자들이 직접 값을 주고 사게 함으로써, 교회는 그들에게 품위와 독립심을 함께 선물하게 된 것이다.
물론 이것은 미국의 한 지역 교회가 가난한 이웃들에게 사랑을 실천하는 한 방법이기 때문에, 다른 모든 교회들이 똑같이 그 모델을 따라야 한다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적어도 모든 개체교회는 동일한 그리스도의 사랑을 동기(motive)로 삼아, 비록 시행착오가 있다고 해도, 그 지역의 정서와 문화에 맞게, 따뜻한 도움의 손길을 내밀면서, 가난한 이웃들의 품위와 독립심을 함께 세워주는 지혜로운 실천적 모델들을 세워가야 한다. 이것이야말로 지혜로운 실천신학적 사역의 한 결과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어떤 학자들은 현대를 가리켜 실천신학의 공백(lacuna) 시대라고 말한다. 전통적인 교회들은 자신들이 물려받은 전통에만 치우친 나머지 세심한 목회적 실천에 대해 무관심하고, 진보적인 교회에서는 자신의 뿌리가 무엇인지, 어떤 신앙적이고 신학적인 열매를 맺어야 하는지 생각하지도 않은 채, 현실에만 매달리기 때문이다. 교회의 사역 현장은 바른 신학과 바른 실천이 만나서 따뜻하고 아름다운 성령의 열매를 맺는, 치열한 실천신학의 장이 되어야 한다.
특히 개혁주의를 지향하는 우리 교회에서는, 칼빈의 언급과 같이 하나님의 입으로서 설교자들이 신실하게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해야 할 뿐만 아니라, 성도들의 변화하는 삶의 상황들에 대한 면밀하고 체계적이며, 목회적으로 포괄적인, 실천신학적인 사고와 실천의 틀을 가져야 한다. 이를 위해 목회자들은 설교를 위한 말씀 연구에 매진할 뿐만 아니라, 성도들의 삶의 현장을 직접 찾아가, 고민과 어려운 사정들을 귀 기울여 들어야 한다. 그 현장의 목소리가 진리와 신학을 실천화 하고 실행하는 데 중요한 참조점이 되어야 한다.
17세기 개혁주의 전통의 권위자이자 사역자인 리처드 벡스터(Richard Baxter)는, 그의 저서 “참된 목자“(the Reformed Pastor)에서, 참된 목회적 돌봄(pastoral care)은 설교, 성례, 그리고 가정과 일터로 찾아가는 집중적 심방에 의한 것이라고 지적하였다. 그가 지적하는 심방이란 단순히 사람을 만났다는 그 이상을 의미한다. 그는 이어 말하기를 참된 목자는 성도들과 “슬픔과 눈물을 함께 나누고, 잘 경청하며, 비밀을 유지하고, 양심이 과도하게 요동할 때에도 검열관이 되지 말 것”을 강조하였다. 벡스터는 신학을 알았고, 사람을 알았으며, 사람에 대한 목회자의 도리를 알았다.
이것은 칼빈이 “마지막으로 선했던 교황“이라 불렀던, 주후 6세기의 위대한 목회신학자 그레고리(Gregory the Great)를 만났을 때도 받는 똑같이 목회자의 인상이다. 그의 저서 ‘목회율’ (Pastoral Rule)을 보면 그는 목회자로서 그 자신이 “인간의 본성에 대한 명민한 관찰자”임을 보여 준다. 그는 인간의 본성에 대해 면밀하게 관찰하였고, 그것을 그의 신학 안에 적극적으로 포함시켰다. 그의 실천신학적 면모를 다음의 인용구를 통해 볼 수 있다.
예를 들어, 종종 어떤 사람들에게 유익한 것이 다른 사람들에게 해를 끼친다. 이것은 어떤 동물에게 좋은 약초가 다른 동물을 죽이기도 하고; 말(馬)을 침착하게 만드는 휘파람이 망아지들을 날뛰게 하고; 한 사람의 질병을 달래주는 약이 다른 사람의 질병을 가중시키기도 한다. (Gregory the Great, Pastoral Care, vol. 11, 1950, 89 )
위의 두 목회자 및 실천신학자들에게서 느끼는 것은 목회적 돌봄과 실천을 단순한 기술이나 요령이 아니라, 신학의 차원으로 비중 있게 논의하고 있다는 것이다. 목회자가 성도를 만날 때, 성도들은 목회자로 하여금 그들 삶의 깊은 것을 함께 느끼게 만들 뿐만 아니라, 그 삶의 조우로 말미암아 목회자로 하여금 다시 신학하게(theologizing) 만든다. 그러므로 목회자의 신학과 성도들의 삶은 떼려야 뗄 수 없는 실천신학의 구성요소가 되는 것이다.
우리의 신학은 성도들의 현실을 만나야 열매를 맺는다. 우리의 실천은 신학의 적용 그 이상일 뿐만 아니라, 단순히 성도들에게서 듣고 느낀 그 이상이어야 한다. 그것은 목회자들이 해야 할 실천적인 작업이며, 동시에 성도들과 함께 해 가야 하는 신학적인 작업이다. 그래서 우리의 신학은 실천적이어야 하며, 우리의 실천은 신학적이어야 한다. 치열하게 논리적이어야 하고, 사색적이어야 하고, 기도하며 묵상한 것이어야 하며, 토론하며 경청한 것이어야 하고, 실행 가능한 것이어야 하고, 무엇보다 자기반성 내지 자기 비판적인(self-critical) 작업이어야 한다.
모든 목회자는 단순한 심판자나 판단자가 아니라 실천신학자이어야 한다. 그것은 그저 서고에 앉아 묵상하는 것만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자리를 털고 일어나 성도들의 삶의 고난에 참여하고, 그들의 이야기를 경청하고, 다시 서고에 돌아와 책을 열고, 기도하고 묵상하며, 그 선한 결실들을 성도들과 나눌 때, 비로소 그 목회자의 실천신학은 모양을 갖추어 가는 것이다. 그러므로 다른 사정을 핑계로, 고통과 외로움 가운데 죽어가는 성도를 심방해 달라는 간절한 요청을 거절하는 일부 목회자는 무모한 사람들이다. 또한 진지한 고민 없이, 자신의 경험대로 일만 가지 상황을 단칼에 해결하려는 목회자 역시 무섭고 무지한 사람들이다. 실천신학의 부재는 교회와 성도들을 병들게 하고, 목회자 자신을 메마르게 한다.
목회자는 면밀하게 사고하고, 용기 있게 행동하는 실천신학자들이어야 한다. 그는 신학을 삶으로 끌고 내려 와서, 고난당하는 성도에게 그 고난이 가진 ‘한 사람만을 위한’ 신학적인 의미 곧 하나님의 뜻을 진지하게 함께 찾아가는, 겸손하고 진지한 공동의 탐색자가 되어야 한다. 우리가 가진 전통을 사랑하고, 고통당하는 삶의 현장에 참여하며, 다시 서고에서 신학과 삶을 기도와 성령으로 겸손히 녹여 다듬을 때, 비로소 세상을 따뜻하게 채우고 치료하는 실천신학이 꽃피게 될 것이다.
65호 선지동산 게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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