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기고글] 무화과나무 비유 - 변종길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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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화과나무 비유
변종길 교수(신약학)
이스라엘의 독립
1948년 5월 14일에 이스라엘은 독립을 선포하였다. 주후 70년에 예루살렘이 멸망한 후 전 세계에 떠돌아다니던 유대인들이 다시금 국가를 형성한 것이다. 근 2천년 동안 나라를 잃고도 민족의 정체성을 유지하고 있었다는 것은 대단한 일이며, 옛 땅에 다시금 국가를 세울 수 있었다는 것도 놀라운 일이다.
그런데 한술 더 떠서 이스라엘의 독립은 예수님의 재림이 가까웠다는 징조로 보는 사람들이 있다. 보통 징조가 아니라 임박한 재림을 알리는 징조로 본다. 그 근거로 그들은 이렇게 주장한다. 예수님은 베다니에서 예루살렘으로 가시는 길에 한 무화과나무를 보시고 저주하셨는데 곧 말라버렸다(마 21:18-19; 막 11:12-14). 예수님은 왜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신 것일까? 이에 대해 많은 학자들은 열매는 없고 잎만 무성한 당시 이스라엘에 대한 심판이라고 본다. 그러나 어떤 학자들은 그렇게 보지 않는다. 예수님은 여기서 단지 ‘믿음’ 또는 ‘기도’에 대한 교훈을 주시기 위해 그런 행동을 취하셨다고 본다. 이어서 나오는 예수님의 말씀이 ‘기도’에 대한 교훈이라는 사실이 이 해석을 지지한다(마 21:21-22; 막 11:21-25).
무화과나무와 여름
그런데 마태복음 24장에 보면, 예수님은 종말에 관한 여러 징조들을 말씀하신 후에 “무화과나무의 비유를 배우라. 그 가지가 연하여지고 잎사귀를 내면 여름이 가까운 줄을 아나니 이와 같이 너희도 이 모든 일을 보거든 인자가 가까이 곧 문 앞에 이른 줄 알라.”고 하신다(33절). 여기에 다시금 ‘무화과나무’가 나타난다. 그래서 ‘무화과나무’의 가지가 연하여지고 잎사귀를 낸다는 것은 멸망했던 ‘이스라엘’이 회복되는 것을 가리킨다고 주장한다.
과연 이 해석이 옳은 것일까? 아니다. 이와 같은 해석은 예수님의 말씀에 대한 오해에서 비롯된 것이다. 예수님은 ‘이스라엘의 독립’을 무화과나무가 다시 잎사귀를 내는 것으로 비유하신 적도 없고 종말의 징조로 여기신 적도 없다. 왜 그런가?
마태복음 24장 32-33절의 말씀은 이런 뜻이다. 이스라엘에 흔히 있는 무화과나무의 예를 통해서 알 수 있듯이, 앞에서 말한 바 전쟁과 기근과 지진과 미혹 등의 징조들이 일어나는 것을 보면 예수님의 재림이 가까운 줄을 알라는 의미이다. 곧, 이런 징조들을 보면 예수님의 재림이 가까운 줄 알라는 의미이다. 이처럼 우리가 자연계의 변화를 통해 여름이 가까운 줄을 알듯이, 예수님이 말씀하신 징조들을 통해 그의 재림이 가깝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자연계의 무화과나무를 한 예로 드신 것이지, 꼭 무화과나무를 ‘이스라엘’로 보고서 그 회복을 말씀하신 것은 아니다.
관사의 유무
원문에 의하면 마태복음 24장 32절의 ‘무화과나무’ 앞에 관사(article)가 붙어 있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이것은 앞에서 나온(마 21:19), 예수님이 저주하신 ‘무화과나무’를 가리킨다고 주장한다. 앞의 ‘한 무화과나무’(a fig tree)가 이스라엘을 지칭했다면, 여기의 ‘그 무화과나무’(the fig tree)는 더 더욱 이스라엘로 해석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헬라어 관사에 대한 오해에서 비롯된 것이다. 헬라어 관사는 반드시 앞에 나온 사물을 지칭하는 것은 아니다. 여기서 ‘무화과나무’ 앞에 관사가 사용된 것은 무화과나무라는 ‘종’(種, genus)을 가리키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자면, 마태는 앞에서 나온 무화과나무를 가리키기 위해 관사를 사용한 것이 아니라 일반적으로 ‘무화과나무’라는 종(種)을 지칭하기 위해 관사를 사용한 것이다.
이 해석이 옳은 것은 누가복음이 직접 증거하고 있다. 병행구절인 누가복음 21장 29절은 이렇게 말하고 있다. “이에 비유로 이르시되 무화과나무와 모든 나무를 보라.” 여기에 보면 ‘무화과나무’만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모든 나무’를 아울러 말씀하셨다. 따라서 ‘무화과나무’ 하나에 특별한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라 ‘무화과나무’를 포함한 ‘모든 나무’의 성장 과정, 생장 원리를 두고 말씀하신 것임을 알 수 있다. 곧, 자연계의 변화를 통해 여름이 가까이 온 것을 알듯이 이런 징조들이 일어나는 것을 통해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온 줄을 안다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마태복음 24장 33절의 ‘이 모든 일’도 이 해석을 지지한다. 만일 32절의 ‘무화과나무의 비유’가 이스라엘의 독립을 가리켰다면, 33절에서 “너희도 이 일(단수)을 보거든 ...”이라고 말씀하셨을 가능성이 크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렇게 말씀하지 않으시고 “이 모든 일(복수)을 보거든”이라고 하셨다. 곧, 앞에서 말씀하신 여러 징조들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다. 그렇다면 32절의 ‘무화과나무 비유’는 자연계의 생장 과정과 여름이 가까움 사이의 일반적 관계를 말한 것이며, 특정한 한 사건을 말한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이것은 병행구절인 마가복음 13장 29절과 누가복음 21장 31절에서도 ‘이런 일’이 원어로는 복수(이런 일들)임을 보아서도 알 수 있다.
온 세상에 복음이 전파되어야
따라서 1948년의 이스라엘 독립이 무화과나무가 다시 잎사귀를 내는 것이라면서 예수님의 재림이 가까웠다고 주장하는 것은 예수님의 말씀에 대한 오해에서 비롯된 것임을 알 수 있다. 우리는 이스라엘의 독립을 세상 역사 측면에서는 중요하게 바라보지만, 종말의 징조와 관련하여서는 특별한 위치를 차지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물론 유대인들은 이스라엘의 독립을 기뻐하고 즐거워하겠지만, 쫓겨난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이를 갈고 있을 것이다. 하나님은 유대인들만 사랑하시는 것이 아니라 아랍인들도 사랑하신다.
중요한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온 세상에 전파되는 것이다. “이 천국 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증거되기 위하여 온 세상에 전파되리니 그제야 끝이 오리라.”고 하셨다(마 24:14). 하나님의 관심은 복음이 온 세상에 전파되는 것에 있으며, 징조들에 대해 지나친 관심을 가지고 야단하는 것이 아니다(살후 2:1-3). 말세가 되면 미혹하는 일들이 더욱 많아질 터인데(살후 2:9-12, 딤후 4:3-4), 우리는 항상 깨어 있어서 주의해야 할 것이다(막 13:33-37).
요즈음 이렇게 미혹과 혼란이 많은 것을 보니 예수님의 재림이 가까이 온 것은 사실인 것 같다. 그러나 그 때는 아무도 모른다고 하였다(마 24:36, 막 13:32). 따라서 우리는 이런 이상한 주장들에 미혹되지 말고 하나님의 말씀과 건전한 교리를 붙들고 지키는 일에 더욱 힘써야 하겠다.
65호 선지동산 게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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