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기고글- "자기 예배”와 실천신학(하재성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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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 예배”와 실천신학
다음의 문제들을 읽어 보고, 나는 어디에 해당하는지 한 번 생각해 보자.
( ) 1. 나는 칭찬받고 싶다
( ) 2. 칭찬은 나를 당황하게 한다
( ) 1. 나는 다른 사람들보다 더 능력 있는 사람이다
( ) 2. 다른 사람들로부터 배울 점이 참 많은 것 같다
( ) 1. 나는 정말 사람들에게 많은 관심을 받고 싶다
( ) 2. 사람들의 주목의 대상이 되는 것은 나를 불편하게 한다
( ) 1. 나는 기회가 있는 대로 자랑하고 싶어진다
( ) 2. 나는 자랑하려 덤비지 않는다
( ) 1. 나는 타고난 지도자이다
( ) 2. 지도력은 오랜 시간에 걸쳐 만들어지는 자질이다
( ) 1. 나는 다른 사람들, 혹은 동료들보다 더 능력 있는 사람이다
( ) 2. 내가 생각할 때 다른 사람들, 혹은 동료들로부터 배울 점이 참 많은 것 같다
만일 위의 문제들에서 세 개 이상의 1번 (각 문항의 첫 번째) 답이 나왔다면 그 사람은 강렬한 자기애적 성향이 강한 사람이다. 자신을 과대하게 중요하게 생각하고, 다른 사람이 자신을 숭배하기를 기대하거나 요구하는 것이다. 주로 청년기에 시작되는 이 증상은 자신의 성취나 능력에 어울리지 않는 특별한 대우를 기대하는 것이다. 무한한 성공을 기대하고, 다른 사람의 순종을 요구한다. 자기 자신이 마치 특별한 자격이 있는 것 같은 느낌을 가지면서, 어디서나 호의적인 대우를 받기를 기대하고, 무한한 성공 내지 이상적인 아름다움, 명석함과 같은 공상에 몰두한다.
자기애적인 사람의 문제는 자기 혼자만의 문제로 머물지 않는다. 왜냐하면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이들은 착취적이기 때문이다. 자신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다른 사람을 이용할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의 감정이나 필요를 전혀 인식하거나 수긍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이런 사람이 다른 사람을 섬기거나 봉사하는 일을 맡게 되면, 그 봉사의 고귀한 본질에 충실하기보다 자기 자신에게 사람들이 주목받게 하려고 사람들을 조종할 가능성이 매우 크다.
이들이 그토록 다른 사람의 관심을 원하는 이유는 곧 자기 속이 텅 비어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텅 비어버린 마음을 채우려다보니 다른 사람들의 관심을 얻으려 하고, 특히 힘이 있거나 능력이 있는 사람을 가까이 하려고 하고, 그들을 설득하여 자신의 목적을 이루려 하는 것이다. 이들은 대화 속에서 자기 자신의 탁월성이나 자신의 주장을 어떻게 끼워넣어야 하는지 기가 막히게 잘 안다. 그런 일에 거의 천부적인 소질을 보인다. 지나서 생각해보면 이야기의 본질보다 그 사람의 개인 자랑만 머릿속에 가득히 남는다. 자신이란 존재를 사람들의 머릿속에 각인시키기 위해 전력 질주한다. 따라서 자기애적인 사람은 곧 자신을 예배하는 사람이다. 그리스도를 전하는 것 같으면서도 정작 자기 자신을 선전하고 전파한다.
자기애적인 성격의 소유자의 가장 치명적인 약점은 자기가 그렇다는 것을 모른다는 사실이다! 차라리 남에게 함부로 호통을 치거나 쉽게 상처를 주는 강박성의 사람들은 후회라도 한다. 집에 돌아와서는 왜 그랬는지 후회한다. 물론 그러고 나서 다시 그렇게 하기도 하지만... 자기애적인 성격의 사람들은 도대체 사람들이 자신에게 뭔가 이상하다고 지적하는 이유를 모른다. 자신에게는 잘못한 것이 전혀 없고, 생각도 나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자신이 사역하는 중고등부의 모든 연극과 발표의 주인공 역할을 혼자 도맡아했던 다른 교단의 어떤 전도사는, ‘왜 아이들에게 주인공을 시키지 않고 혼자서 다 하느냐?’는 어느 성도의 지적이 무슨 뜻인지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표정이었다.
자기애적인 성격의 특징은 무감각이다. 다른 사람들의 칭찬과 예배를 자기 자신이 얼마나 기대하는지, 다른 사람이 얼마나 자기 때문에 괴로운 지 전혀 알지 못한다. 그저 자신을 ‘큰 자’라 여기고, 그 누구든 자신을 ‘섭섭’하게 하는 것을 견디지 못한다. 하나님은 끊임없이 메시지를 주시는데 이들은 무감각하여 깨닫지 못한다. 물론 자비로우신 하나님은 이런 사람들조차 사용하시기 위해 이들을 꺾으신다. 하나님은 야곱의 약삭빠름과 자기 성취감, 그리고 그 본성의 자기중심성을 꺾기 위해 환도뼈를 치셨다. 오직 하나님만 예배하게 하기 위해 요셉의 옷을 벗기고 메마른 우물에도 던져 넣으시고, 무고하게 감옥에서 고통을 당하며 가장 소중한 20대 청년기의 몇 년을 썩게 하셨다. 골리앗을 이겼던 다윗을 꺾으시고 낮추시기 위해 10년이 넘게 쫓기며 광야의 이슬을 맞고 방황하게 하셨다.
물론 필자를 비롯한 우리 죄인들 모두에게는 기본적으로 자신을 예배하려는 강한 자기애적인 본성이 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자신의 종으로 만들기 위해 얼마나 오랫동안 그 강력한 본성을 꺾어 오셨는지 너무나 잘 안다. 그나마 하나님께서 참 많은 뼈들을 꺾으셨음을 늦게나마 깨닫는 것은 은혜이다. 하나님은 그렇게 ‘꺾인’ 사람을 원하신다. 늙은 모세, 실패한 베드로를 기뻐하셨다. 문제는 지도자의 위치에 있으면서도 하나님을 예배하는지 자신을 예배하는지 알지 못하는 무지가 너무 오래 지속되는 것이다. 하나님께 깨닫게 하시기 위해 징계하셔도 아픈 줄도 모르는 무감각으로 무장한 것이다. 하나님의 꺾으심을 아프다고 여기지도 않는 사람의 무감각을 하나님은 반드시 징계하신다고 칼빈은 말한다. 지도자의 ‘자기 예배’는 반드시 꺾여야 한다. 우리는 오직 하나님만 예배해야 하기 때문이다.
실천신학은 자기 예배의 징후가 병든 인격에서 올 수도 있음을 알게 해 준다. 왜냐하면 실천신학은 심리학을 비롯한 사회과학과 자연과학적 지식들과 비평적으로 대화할 수 있기 때문이다. 개혁주의 신학자이면서 정치가였던 화란의 신학자 아브라함 카이퍼(Abraham Kuyper)는 일찍부터 과학의 발전에 대한 적극적인 태도로 과학의 자율성을 신학이 인정해야 할 일반은총의 영역에 포함시켰다. Kuyper에게 있어서 과학이란 물리학이나 생물학 같은 중추적인 과학뿐만 아니라, 인문학과 사회과학까지도 포괄하는 개념이었다. 따라서 이런 과학의 연구나 적용에 참여하는 모든 행위는 “신실한 기독교적 참여”를 뜻하며, 이는 “하나님의 피조된 질서의 총체성 안에서 인간 삶의 충만함을 추구함을 뜻한다.”(Kuyper, Wisdom and Wonder, p. 29). 무엇보다도 과학 스스로의 발전과, 그리스도인들의 과학에의 참여는 교회의 허가를 필요로 하지 않음을 그는 강조하고 있다. 이는 본질적으로 “하나님께서 일반은총에 의해 우리로 하여금 창조세계의 번성에 공헌하는 다양한 방법으로 공공의 영역에 참여토록 하시”기 때문이다.
장로교 신학자 에드 팔리(Ed Farley)는 이런 사회과학적 지식을 통해 실천신학이 인간 내면의 자기 “우상들, 절대화된 그들의 자기 이익, 그들의 자기 민족 중심주의, 그리고 권력 구조들에 대한 그들의 개입”을 비평적으로 분별해내야 한다고 말한다. 그래서 “자기 의식적(self-conscious), 자기 비판적(self-critical), 자기 규율적(self-disciplined)”인 현실해석및 상황해석을 할 수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 필자를 포함한 오늘날 한국 교회와 지도자들 안에 만연한 ‘자기 예배’를 인식하고, 회개하고, 극복하는 실천신학이 절실하다.
(선지동산 67회 게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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