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기고글] “바르게 살라고 설교하지 말라” - 박영돈 교수
페이지 정보
본문
“바르게 살라고 설교하지 말라”
선지동산 41호 게재 / 성화의 복음(1) / 박영돈 교수
일전에 신학대학원에서 특강강사로 초청 받은 어떤 목사가 강의 중에 신학생들에게 “교인들에게 바르게 살라고 설교하지 말라”고 했다. 이 말은 듣는 이들의 마음속에 여러 가지 반향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말이다. 목사가 교인들에게 바르게 살라고 설교하지 않는다면 도대체 무엇을 설교해야 한단 말인가? 그 목사는 어떤 의미로 이런 말을 한 것인가? 그는 한국교회가 안고 있는 가장 심각한 병폐가 교인들이 바르게 살지 못하는 윤리적 실패라는 것을 도무지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는 말인가? 그 어느 때 보다도 지금이 그런 설교가 한국교회에 가장 절실히 필요한 때가 아닌가?
그의 강의를 계속 들어보면 그가 어떤 취지로 그런 말을 했는지가 분명해진다. 여느 목회자와 같이, 그의 관심 또한 교인들을 바르게 살게 하는 것이다. 그가 반대하는 것은 교인들을 바르게 살게 하는 설교가 아니라 바르게 살라고 누누이 강조하지만 바르게 사는데 도움이 안 되고 오히려 역효과를 자아내는 설교이다. 그의 말은 한국교회의 강단에 만연해 있는 윤리적인 설교가 교인들에게 큰 부담만을 안겨 줄 뿐 진정한 변화와 성숙을 증진시키지 못함을 지적하는 일침이라고 본다. 그가 지적했듯이, “한국에 교인들이 천 만이나 되는데 왜 이 사회가 이 모양인가, 그리스도인들이 정직하고 바르게 살지 못해서 그렇다”는 것을 되뇌는 설교에 교인들은 이제 아주 식상해 있다. 교인들은 그런 당위적인 사실을 거듭 들추어내는 잔소리 같은 훈계를 듣기보다는 목사의 설교를 통해 그리스도인답게 살 수 있는 능력과 은혜를 받기 원한다.
이 목사의 말은 곱씹어 볼만한 가치가 있다. 그 동안 축복과 은혜에만 초점을 맞춘 설교가 한국교회 안에 윤리적인 나태와 방종을 조장했다는 사실을 부인할 수 없다. 이에 대한 역반응으로 이제는 윤리를 강조하는 설교가 점증하고 있다. 그러나 여기에도 또 다른 위험이 도사리고 있다. 은혜에 치중한 설교가 무율법적 혼란을 초래한다면, 윤리적 설교는 다른 극단, 율법주의의 함정에 빠지기 쉽다. 은혜를 “거룩함의 열매를 반드시 생산하는 은혜”로 제시하지 못한 메시지가 한국교회에 윤리적 문제를 야기했다면, 신자의 윤리적 책임을 가능케 하는 은혜의 풍성함을 밝혀주지 못하는 설교 또한 교회의 영성에 심각한 폐해를 끼친다. 거룩한 삶을 강조하는 설교가 그 선한 의도대로 윤리적인 삶을 산출하지 못하고 오히려 교인들이 바르게 사는데 거침돌이 될 수 있다는 것은 아이러니하면서도 설교자들이 꼭 유념해야 할 사실이다. 그래서 스펄젼 목사는 자주 “윤리만을 설교하면 신자들을 오히려 더 비윤리적인 사람들로 만들 것이라”고 경고했다. 안타깝게도 한국교회에 많은 교인들은 도덕적으로 각색되어 복음의 핵심이 흐려진 율법적인 메시지에 짓눌려 그리스도 안의 자유와 생명력을 누리지 못하고 있다. “교인들에게 바르게 살라고 설교하지 말라”는 그 목사의 권면은 이러한 문제를 직시한데서 온 시의적절한 지적이라고 본다. 물론, 이 말 자체만으로는 오해의 소지가 있을 수 있으나 그 의미는 분명하다. 은혜를 확실하게 제시하지 않고 윤리만을 강조하지 말라는 뜻이다.
바르게 살지 못하게 하는 두 거침돌
한국교회에 나타나는 무율법주의적 성향과 율법주의적 폐단은 모두 복음의 양면, 즉 은혜와 윤리의 균형을 상실한데서 비롯되었다. 이 양극단적인 경향은 모두 교회의 진정한 윤리적 갱신과 영적 성숙을 방해하고 있다. 그러므로 이 복음의 균형을 회복하는 것이 한국교회가 당면한 시급한 과제이다. 이 시점에서 우리는 교회의 설교와 가르침, 상담과 영성훈련 등 목회사역의 전 영역에서 복음의 양면성이 조화롭게 이해되고 균형 있게 강조되고 있는지를 한번 면밀히 검토해 보아야 한다.
실제로 교회에서 은혜와 윤리를 서로 상충된 것으로 봄으로써 의도적으로 어느 한 쪽만을 강조하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 대부분 두 요소 모두 필요하다는 것을 인정한다. 문제는 어느 한 쪽으로 지나치게 편중되거나 두 측면이 긴밀하게 연결되지 못하는데 있다. 은혜를 윤리와의 밀접한 관계 속에서 논하는 것이 쉽지 않은 것처럼 윤리를 은혜의 분명한 근거 위에서 강조하는 것 역시 수월치 않다.
문제의 심각성은 설교에서 이 균형을 유지하기가 어려울 뿐만 아니라, 말씀을 듣는 자들 안에 사태를 더욱 악화시키는 요소가 내재하는 데 있다. 교인들 중에는 무율법주의 성향이 강한 이들이 있는 반면에 율법주의로 치우치는 이들이 있다. 따라서 강단에서 전파되는 메시지가 듣는 이들의 성향에 따라 굴절되어 받아들여지고 뒤틀리게 해석되어 적용된다. 은혜를 좀 더 강조하는 설교를 자주 들을 때 전자의 속성을 가진 교인들은 자신들의 윤리적 실패를 합리화하는 수단으로 은혜를 남용하기 쉽다. 반대로 윤리에 치중하는 설교가 빈번하게 전해질 때, 후자에 속한 교인들은 하나님의 은혜를 전적으로 의지하기보다 자신의 경건의 노력과 도덕적 열심을 통해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를 유지하려는 율법주의의 위험에 빠질 가능성이 많다.
이와 같이 어떤 이들은 율법주의로, 또 다른 이들은 무율법주의로 치우치기도 하지만 이 두 성향은 모든 교인들 안에 항상 공존하고 있다. 왜냐하면 인간은 천성적으로 율법주의자인 동시에 무율법주의자이기 때문이다. 인간 안에는 하나님의 은혜를 거부하고 자신의 의를 세우려는 율법주의적 교만이 뿌리박혀 있는 동시에, 하나님의 법에 굴복치 않고 육신의 소욕을 따라 제멋대로 살려는 무율법적 방종이 꿈틀거리고 있다. 인간의 율법주의 성향은 은혜를 거부함으로써 결국 은혜로만 가능한 윤리까지 배격하게 된다. 역으로, 인간의 무율법주의 성향은 윤리를 무시함으로써 결국 윤리적 삶을 위해 주어진 은혜를 껍데기 은혜로 변질시켜 버린다. 흥미롭게도 이렇게 서로 상반되는 경향, 율법주의와 무율법주의는 진정한 의미에서 은혜뿐 아니라 윤리까지 배격한다는 면에서 서로 일맥상통한다.
이러한 인간의 부패성으로 인해 복음이 교묘히 왜곡될 수 있기 때문에 설교자들은 은혜와 윤리의 균형을 유지하는데 부단한 관심과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교회 역사 속에서 우리 선진들은 이러한 노력을 통해 복음의 핵심을 양 극단적 오류로부터 보존해 왔다. 바울의 복음에서 볼 수 있는 은혜와 윤리의 적절한 조화는 율법주의와 무율법주의와의 논쟁의 배경 속에서 형성되었다. 바울은 유대 율법주의에 대응하여 구원은 하나님의 전적 은혜에 근거함을 역설하는 동시에, 예상되는 무율법주의적 반론(“은혜를 더하기 위해 죄 아래 거하겠느냐”(롬6:1))을 잠재우기 위해서는 은혜에 근거한 윤리를 강조한다. 루터나 캘빈과 같은 종교개혁자들도 한편으로는 율법주의적 요소를 안고 있던 로마 가톨릭의 구원관을 배격하기 위해 오직 은혜에 근거한 칭의론을, 다른 한편으로는 은혜는 반드시 윤리적 삶을 산출한다는 사실을 각각 치밀한 논증으로 부각시켰다. 지금도 율법주의와 무율법주의의 위협은 우리 교회 안에 여전히 존재하고 있다. 이런 위험으로부터 복음의 순수성을 보존하기 위해 복음 전파자들은 바울과 종교개혁자들의 가르침을 통해 은혜와 윤리를 적절히 연결하는 지혜를 터득해야 한다. (다음호에)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