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기고글]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 길성남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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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계 2:10)
선지동산 43호 게재 / 성경본문 바로읽기(11) / 길성남 교수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면류관을 네게 주리라.” 아마도 이 본문은 요한계시록에서 한국교회 성도들에게 가장 많이 알려진 말씀일 것입니다. 동시에 이 말씀은 한국교회 안에서 오랫동안 잘못 해석되어온 대표적인 본문이기도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 말씀을 하나님께 받은 직분을 끝까지 잘 감당하면 복을 받게 된다는 식으로 이해합니다. 장로, 집사, 권사를 세우는 임직식에서 이 본문을 인용하여, “여러분, 받은 직분을 충성스럽게 감당하십시오. 그렇게 하면 하나님께서 생명의 면류관을 여러분에게 주실 것입니다”라고 권면하는 목회자들이 적지 않습니다. 그러다보니 교인들도 이런 식의 본문 이해를 당연한 것으로 생각합니다. 심지어 은퇴를 앞 둔 장로나 권사들 중에 이 본문에 근거해서 은퇴 제도 자체에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들까지 있습니다.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는 말씀을 죽을 때까지 직분을 감당하라는 식으로 이해하기 때문입니다.
요한계시록 2장 10절을 이렇게 이해하는 가장 큰 이유는 아마도 이 본문에 등장하는 “충성”이라는 단어 때문일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 단어를 직분과 관련하여 충성스럽게 하나님과 교회를 섬기는 것으로 해석합니다. 같은 단어가 등장하는 고린도전서 4장 2절(“그리고 맡은 자들에게 구할 것은 충성이니라”)을 함께 읽으면 이런 해석이 옳은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본문의 단어 하나에 근거해서 본문 전체의 의미를 결정하는 것은 온당치 않습니다. 단어의 의미보다 문맥이 우선합니다. 본문은 반드시 문맥 안에서 읽고 해석해야 합니다. 본문을 문맥에서 분리하거나 문맥을 고려하지 않고 읽는다면 잘못된 해석에 빠질 수밖에 없습니다.
이제 요한계시록 2장 10절의 문맥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넓은 문맥을 살펴보면, 이 본문이 부활하신 주님께서 소아시아의 일곱 교회에게 하신 말씀(2:1-3:22)에 속해 있음을 쉽게 알 수 있습니다. 또 가까운 문맥을 보면 서머나 교회에게 주신 말씀의 단락(2:8-11)에 포함되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 단락은 이렇게 시작됩니다. “서머나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기를 처음이요 나중이요 죽었다가 살아나신 이가 가라사대.” 이것은 무엇을 알려줍니까?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면류관을 네게 주리라”하는 말씀의 대상을 알려줍니다. 이 말씀의 본래 대상은 오늘날 직분을 맡은 사람들이 아니라 2천년 전 소아시아 지역에 살던 서머나 교회의 성도들입니다(서머나는 호머가 탄생한 도시로서 1세기에는 아시아의 ‘첫째 도시’라고 불려졌습니다. 1세기에 교회가 있던 소아시아의 일곱 도시들 가운데 오늘날까지 존재하는 유일한 도시이며, 오늘날에는 이즈미르[Izmir]라고 부릅니다). 우리는 성경의 본문을 오늘날의 독자나 청중의 상황에 적용하기 전에 그 본문이 주어진 본래의 상황을 살펴보아야 합니다. 요한계시록 2장 10절이 본래 서머나 교회에 주어진 말씀이라는 사실을 안다면 이 본문을 직분자들을 위한 권면에 쉽게 사용할 수 없을 것입니다.
다음으로 본문의 문맥을 살피면서 본문이 주어진 본래의 상황을 파악해야 합니다. 주님께서 서머나 교회에 주신 말씀에서 가장 두드러진 것은 “환난”입니다. 9절에서 부활하신 주님은 서머나 교회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네 환난과 궁핍을 아노니 실상은 네가 부요한 자니라.” 서머나 교회는 환란을 겪었으며 매우 궁핍했습니다. 특별히 서머나 교회는 자칭 유대인이라 하는 자들에게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1세기 당시에 서머나에는 많은 유대인들이 살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유대교 회당에 출석하던, 하나님을 경외하는 이방인들이 기독교로 개종하는 것을 못마땅하게 여겼습니다. 그래서 관원들에게 기독교인들을 고발했고, 사람들을 동원하여 기독교인들을 공격하기도 했습니다. 그 결과 서머나 교회의 성도들은 집을 잃거나 직장을 잃었습니다. 경제적으로 궁핍해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서머나 교회의 성도들은 신앙을 굳게 지켰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그들을 칭찬하십니다. “실상은 네가 부요한 자니라”(9절). 서머나 교회는 소아시아의 일곱 교회들 가운데 빌라델비아 교회와 함께 주님께 칭찬을 들은 교회입니다.
그러나 서머나 교회의 환난은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장차 10일 동안 환란을 받게 될 것입니다. 부활하신 주님은 환난을 예고하시면서 서머나 교회의 성도들을 격려하십니다. “네가 장차 받을 고난을 두려워 말라 볼지어다 마귀가 장차 너희 가운데서 몇 사람을 옥에 던져 시험을 받게 하리니 너희가 십일 동안 환난을 받으리라”(10절).
서머나 교회가 받을 환난의 중심에는 마귀가 있습니다. 주님은 마귀가 서머나 교회 성도들 중 몇 사람을 옥에 던져 시험을 받게 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참으로 의아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주님은 마귀에게 시험을 받지 않도록 자기 백성을 보호하시는 분이 아닙니까? 그런데 마귀가 서머나 교회 성도들을 옥에 던져 시험할 것을 알고 계시면서도 마귀의 시험을 막지 않으십니다. 왜 그렇게 하실까요? 마귀는 주님을 버리게 만들려는 목적에서 서머나 교회 성도들을 시험합니다. 그러나 주님은 마귀의 시험을 이용해서 자기 백성을 연단하십니다. 물론 주님은 마귀의 손에 자기 백성을 완전히 내어주지 아니하십니다. 주님은 마귀의 시험 기간을 제한하십니다. 서머나 교회 성도들은 10일 동안만 환난을 받게 될 것입니다. 마귀의 시험이 주님의 주권적 다스림 안에서 진행되는 것입니다.
이처럼 서머나 교회가 받을 환난을 예고하는 맥락에서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면류관을 네게 주리라”하는 말씀이 주어집니다. 그러므로 이 말씀의 의미를 바르게 해석하려면 환난을 예고하는 맥락을 진지하게 고려해야 하는 것입니다. 서머나 교회 성도들이 환난을 받는 근본 원인은 무엇입니까? 그들이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 때문입니다. 만일 그들이 예수님을 믿지 않는다면 환난도 받지 않을 것입니다. 마귀가 그들 중 일부를 옥에 던져 시험을 받게 하는 목적도 믿음을 버리게 하는데 있습니다. 그러므로 환난을 받는 상황에서 “충성”이란 주님을 믿는 믿음을 굳게 지키는 것을 뜻합니다.
이런 해석은 헬라어 본문의 지지를 받습니다. 한글 개역성경에서 “충성”이라고 번역한 헬라어 단어는 “피스토스”(pistos)입니다. 믿음을 뜻하는 명사 “피스티스”(pistis)에서 파생된 형용사로서 “신실한”(faithful)이라고 번역할 수 있습니다. 이 형용사는 “끝까지 충성을 다하는,” “끝까지 신의를 지키는”을 뜻합니다. 환난을 받을 때 서머나 교회 성도들은 예수님을 믿는 믿음을 포기하지 말고 끝까지 지켜야 하는 것입니다(참조. 계 12:11; 14:12).
그리고 한글 개역성경에서 “죽도록”이라고 번역한 표현은 “죽음의 정도까지”(to the point of death)를 뜻합니다. 믿음을 지키되 죽기까지 믿음을 지키라는 말입니다. 주님께서 환난의 기간을 10일로 제한하셨더라도 환난은 힘들고 고통스러운 것입니다. 환난을 받다가 목숨을 잃을 수도 있습니다. 이럴 때 어떻게 해야 합니까? 죽더라도 믿음을 지켜야 합니다. 믿음으로 인해서 환난을 당하다가 죽게 된다면 기꺼이 죽어야 하는 것입니다(참조. NIV: “Be faithful, even to the point of death”).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면류관을 네게 주리라”는 구절도 이런 해석을 지지합니다. 이 구절에서 “생명의 면류관”이란 표현은 많은 주석가들이 지적하는 대로, 생명 그 자체인 관(the crown that is life)을 뜻합니다(“면류관”이란 제왕이 정복에 갖추어 쓰던 관입니다. 그러나 요한계시록 2장의 문맥에서 이 단어[헬라어, 스테파노스 stephanos]는 운동경기의 승자에게 주어지는 화관이나 월계관을 가리킵니다. 고대에 서머나는 운동경기로 유명한 도시였으므로 이런 은유가 적절했을 것입니다). 끝까지 믿음을 지킨 자들에게 주님께서 마지막 때 부활의 생명을 상급으로 주신다는 말씀입니다. 이것은 아마도 환난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믿음을 지키다가 목숨을 잃게 될 사람들을 염두에 두고 하신 말씀일 것입니다. 부활의 주님께서 영원한 생명을 주실 것이므로 환난에 굴하지 않고 끝까지 믿음을 지키는 자, 곧 “이기는 자는 둘째 사망의 해를 받지” 않게 될 것입니다(11절). 이런 주님의 약속을 받은 서머나 교회 성도들은 마귀의 시험을 이겨내고 끝까지 믿음을 지켰을 것입니다.
이상에서 살펴본 대로,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는 말씀은 본래 직분을 맡는 자들에게 주신 것이 아니라 장차 환란을 당할 서머나 교회 성도들에게 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맡은 직분을 죽을 때까지 충성스럽게 감당하라는 식으로 이 말씀을 해석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이것은 본문의 문맥을 전혀 고려하지 않은 자의적 해석이며, 이 말씀을 하신 주님의 의도마저 무시한 해석입니다. 직분을 맡은 자들에게 권면하려면 요한계시록 2장 10절이 아니라, 고린도전서 4장 1-2절이나 직접적으로 직분과 관련된 본문을 택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 믿음 때문에 환난이나 핍박을 받는 일이 없는 시대에는 요한계시록 2장 10절을 적용하기가 어려운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이 본문의 가르침이 오늘날에도 여전히 중요하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합니다. 이 본문이 주는 가장 중요한 가르침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이 생명보다 귀하다는 것입니다. 또 예수 그리스도로 인해 핍박이나 환난을 당하는 것은 슬픔이 아니라 특권이라는 것입니다. 환난이 고통스러운 것은 사실이지만 동시에 그것은 더 깊은 차원에서 그리스도를 경험하게 만듭니다. 서머나 교회는 큰 환난을 당했지만 결과적으로 그리스도를 더 깊이 경험하게 되었고, 영원한 생명을 약속받았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와 그를 믿는 믿음을 목숨보다 귀하게 여겨야 할 것이고, 믿음을 위해서라면 핍박이나 순교까지도 기꺼이 감수해야 할 것입니다.
또한 이 본문은 그리스도인들이 믿음으로 인해 언제든 환난을 당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려줍니다. 이 세상에서 아무 고통이나 환난 없이 편안하게 사는 것은 사람들의 오랜 소망입니다. 그리스도인들도 “고요하고 평안한 생활”(딤전 2:2)을 갈망합니다. 그러나 주님은 때때로 자기를 믿는 자들에게 환난을 주십니다. 마귀가 그리스도인들을 환난의 자리로 밀어 넣는 것을 허용하시기도 합니다. 우리의 믿음이 시험과 연단을 통해 더욱 강해져야 하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우리가 환난을 당할 때 함께 하십니다. 환난의 정도나 기간을 제한하시고 환난을 이길 힘도 주십니다. 그리고 환난에 굴하지 않고 끝까지 믿음을 지키는 자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약속하십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은 불시험이 온다 할지라도 두려워하지 말아야 합니다. 오직 주님의 약속을 굳게 믿고 죽기까지 믿음을 지켜야 할 것입니다. (다음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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