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기고글] 하나님께서 주신 “만족”? - 길성남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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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께서 주신 “만족”?
-고린도후서 3장 5절의 번역과 해석-
선지동산 42호 게재 / 성경본문 바로읽기(10) / 길성남 교수
신약성경은 1세기경에 코이네 헬라어(Koine Greek, 기원전 330년부터 기원후 330년 사이에 사용된 헬라어)로 기록되었습니다. 알렉산더 대왕의 정복 전쟁의 결과로 지중해 연안 지역에 헬라어가 널리 보급되었습니다. 오늘날까지 남아 있는 비문들은 스페인에서부터 인도의 서쪽 경계에 이르는 넓은 지역에서 헬라어가 통용되었음을 보여줍니다. 헬라제국 이후에 지중해 연안의 패권을 차지한 로마제국의 수도 로마에서도 문인들과 예술가들과 상인들이 라틴어보다 헬라어를 더 즐겨 사용했습니다. 이런 까닭에 사도 바울과 베드로를 포함한 신약성경의 기자들이 히브리어나 아람어가 아니라 헬라어로 신약성경을 기록한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더구나 신약성경 시대의 헬라어는 현대의 언어들에도 뒤지지 않는 정확성과 풍부한 표현력을 갖고 있었습니다.
오늘날 한국교회에서 사용하는 신약성경은 헬라어로 기록된 본문을 우리말로 번역한 것입니다. 대한성서공회(당시 영국성서공회 경성지부)는 1900년에 처음으로 신약성경을 우리말로 출판하였습니다. 이것을 고치고 다듬어서 1938년에 「신약전서 개역」을 출판했고, 그 후 두어 차례에 걸쳐 손질하고 한글맞춤법 통일안에 따라 표기를 고쳐서 1961년에 「성경전서 개역 한글판」(구약과 신약이 모두 포함됨)을 출판했습니다. 이것을 개역의 결정판, 또는 개역의 최종판이라고 부릅니다. 오늘날 한국 개신교 안에서 널리 사용하고 있는 것이 바로 이 성경입니다.
그런데 번역자들의 많은 수고와 개정 작업에도 불구하고 개역 한글판에는 오역된 부분이 없지 않습니다. 신자의 구원과 삶에 영향을 미칠 만큼 심각한 오역은 없습니다. 하지만 오역된 부분이 있는 것이 사실이므로 성경을 가르치는 사람들은 반드시 개역 한글판과 함께 여러 종류의 번역 성경을 사용해야 합니다.
한 가지 예를 들어보도록 하겠습니다. 「성경전서 개역 한글판」은 고린도후서 3장 5절을 이렇게 번역하였습니다. “우리가 무슨 일이든지 우리에게서 난 것 같이 생각하여 스스로 만족할 것이 아니니 우리의 만족은 오직 하나님께로서 났느니라.” 대한성서공회가 1998년에 출판한 「개역 개정판」도 개역 한글판의 번역과 거의 같습니다(“우리가 무슨 일이든지 우리에게서 난 것 같이 스스로 만족할 것이 아니니 우리의 만족은 오직 하나님으로부터 나느니라”). 이 본문에서 사도 바울은 무엇을 말하고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주신 “만족”에 관해서 말하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래서 많은 설교자들이 이 본문에 근거하여 “이 세상에서는 진정한 만족을 얻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만이 진정한 만족을 주실 수 있습니다”라고 설교합니다. 이 본문을 읽고 묵상하는 사람들도 “참 만족을 얻으려면 하나님을 바라보아야 한다”는 교훈을 본문에서 끌어냅니다.
하나님만이 우리에게 참된 만족을 주실 수 있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하나님은 마른 곳에서도 우리의 영혼을 만족케 하여 우리를 물 댄 동산이나 물이 마르지 않는 샘과 같게 하시는 분입니다(사 58:11). 또 좋은 것으로 우리의 소원을 만족케 하시고 우리의 청춘으로 독수리 같이 새롭게 하시는 분입니다(시 103:5). 그러나 문제는 고린도후서 3장 5절에서 사도 바울이 “만족”에 관해서 말하고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대한성서공회가 2001년에 출판한 「표준새번역 개정판」은 이 본문을 이렇게 번역합니다. “우리가 이런 일을 할 수 있는 자격이 우리에게서 났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자격은 하나님에게서 납니다.” 이 번역은 본문의 핵심 요소가 “만족”이 아니라 “자격”임을 보여줍니다. 개역 한글판이나 개역 개정판과는 판이하게 다릅니다. 그러면 두 종류의 번역 가운데 어느 것이 옳습니까?
한글 번역본들이 일치하지 않을 때 설교자들은 대체로 영어 번역본을 살펴봅니다. 한글 번역본들과 영어(또는 다른 외국어) 번역본들을 비교해서 읽는 것은 본문을 이해하는데 큰 도움을 줍니다. 하지만 영어(또는 다른 외국어) 번역본들의 번역이 일치하는 않는 경우도 종종 있습니다. 이럴 때에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원어 성경의 본문을 살펴보고, 본문을 스스로 번역해보거나 번역본들 중에서 원문 성경에 가장 가까운 것을 찾아내야 합니다. 이렇게 하려면 성경 원어를 배워야 합니다. 성경 원어를 모르면 히브리어 사전이나 헬라어 사전을 사용할 수 없고, 성경 본문을 해설한 주석서도 제대로 사용할 수 없습니다.
헬라어 성경으로 고린도후서 3장 5절을 읽으면, 한글 성경에서 “만족,” 또는 “자격”이라고 번역한 단어가 “히카노테스(hikanotēs)”라는 명사임을 알 수 있습니다. 5절에는 이 명사와 함께 형용사 “히카노스(hikanos)”가, 6절에는 동사 “히카노오(hikanoō)”가 등장합니다. 바우어의 헬라어 사전(BDAG)에 따르면, 명사 “히카노테스”는 “자격을 갖춘 상태,” 또는 “충분한 상태”를 의미합니다. 따라서 “적당,” “능력,” “자격”이라고 번역할 수 있습니다. 이 단어가 뜻하는 “충분한 상태”가 “만족”의 개념을 내포하고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그래서 마가복음 15:15에서는 형용사 “히카노스”를 이런 뜻으로 사용합니다(“빌라도가 무리에게 만족을 주고자 하여 바라바는 놓아 주고 예수는 채찍질하고 십자가에 못 박히게 넘겨주니라”). 그러나 이 형용사는 마가복음의 경우를 제외하고는 신약성경에서 모두 “능력”이나 “자격”의 개념으로 나타납니다(마 3:11; 막 1:7; 눅 3:16; 고전 15:9; 담후 2:2).
동사 “히카노오”는 신약성경에서 고린도후서 3장 6절과 골로새서 1장 12절, 두 곳에만 등장합니다. 후자의 본문에서 이 동사는 “자격을 갖추게 하다,” “합당하게 만들다”라는 의미로 사용됩니다. 개역 한글판도 이런 의미로 번역하였습니다(“우리로 하여금 빛 가운데서 성도의 기업의 부분을 얻기에 합당하게 하신 아버지께 감사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하나님께서 믿는 자들에게 성도의 기업의 한 부분을 얻기에 합당한 자격을 주셨다는 말입니다.
고린도후서 3장 5절에서 명사 “히카노테스”가 “자격”을 뜻한다는 사실은 문맥을 살펴볼 때 더욱 분명해집니다. 개역 한글판은 6절 전반부를 이렇게 번역하였습니다. “저가 또 우리로 새 언약의 일군(꾼) 되기에 만족케 하셨으니.” 이 번역은 어딘가 어색하고 부적절해 보입니다. 사도 바울과 그의 동료들은 새 언약의 일꾼이 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을까요? 하나님께서 자신들을 새 언약의 일꾼으로 세운 것에 불만을 가졌을까요? 그래서 하나님께서 그들을 만족시켜야 했을까요?
그러나 가까운 문맥에서 사도 바울은 새 언약의 직분을 “영의 직분”(8절)이자 “의의 직분”(9절)이라고 말합니다. 또 새 언약의 직분이 의문의 직분(정죄의 직분)보다 훨씬 더 영광스럽다고 말합니다(9-11절). 그는 새 언약의 일꾼이 되는 것이 말할 수 없이 영광스럽다는 것을 잘 알았습니다. 동시에 자기 자신은 그 직분을 받을만한 자격이 조금도 없는 자라는 것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고린도전서 15장 9절에서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나는 사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라 내가 하나님의 교회를 핍박하였으므로 사도라 칭함을 받기에 감당치 못할 자로라.” 이 본문에서 “감당치 못할”이라는 표현은 헬라어 형용사 “히카노스”를 부정어와 함께 번역한 것입니다. 이 형용사는 “적절한,” “능력이 있는,” 또는 “자격이 있는”을 뜻합니다. 바울은 사도의 직분을 받을만한 자격이 전혀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를 충성되이 여겨 그에게 직분을 맡기신 것입니다(딤전 1:12)
아무 자격이 없는 자가 영광의 직분을 받을 때 어떻게 반응할까요? 만족해할까요? 새 언약의 일꾼이 되는 것은 만족의 차원을 넘어선 것입니다. 새 언약의 직분이 지닌 영광스러움을 안다면, “새 언약의 일꾼이 된 것에 만족한다”라고 말하지 못할 것입니다. 새 언약의 직분을 받을만한 자격이 전혀 없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하나님 앞에서 감히 고개도 들지 못할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3장 4-6절에서 사도 바울이 말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참된 만족을 주셨다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아무 자격이 없는 자들에게 영광스러운 직분을 맡기셨고 은사와 능력을 주심으로써 그 직분을 감당할 수 있게 해주셨다는 것입니다. 사도의 이런 주장에는 논쟁적인 측면이 있습니다. 고린도 교회의 일부 성도들은 바울이 고린도에 왔을 때 그들에게 천거서(추천장)를 제시하지 않은 것을 문제 삼았습니다(고후 3:1-3). 아마도 고린도 교회에 침투한 거짓 사도들이 이렇게 부추겼을 것입니다. “이방인 지역에서 사역을 하려면 예루살렘 교회의 천거서가 있어야 하는데, 바울이 천거서를 너희에게 제시한 적이 있느냐? 그런 적이 없다면 바울은 합법적인 사역자가 아니다. 그에게 천거서를 요구하라.” 바울은 이런 요구에 어떻게 대응합니까? 예루살렘 사도들의 천거서를 제시하는 대신에 고린도 교회 성도들이 자신의 천거서라고 말합니다. 그들은 사도 바울의 사역의 열매입니다. 고린도 교회의 존재 자체가 바울의 사도됨의 증거이자 사역의 증거인 것입니다(참조. 고후 3:2-3).
이어서 바울은 자신이 새 언약의 일꾼이 될만한 자격이 없다고 말합니다. 자격은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과거에 하나님의 교회를 핍박한 사람에게 무슨 자격이 있겠습니까? 그런데도 그는 영광스러운 새 언약의 직분을 받았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를 새 언약의 일꾼이 되기에 합당하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새 언약의 직분을 감당할 수 있는 능력을 주심으로 합당한 자격을 갖추게 하신 것입니다. 합당한 자격은 바울 자신에게서 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를 친히 새 언약의 일꾼으로 세우셨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그 누구도 바울의 자격에 시비를 걸 수 없습니다. 그에게 천거서를 내놓으라고 요구해서도 안 됩니다. 그렇게 하는 것은 그에게 자격을 부여하시고 그를 새 언약의 일꾼으로 세우신 하나님께 시비를 거는 것과 다름없기 때문입니다.
만일 우리가 고린도후서 3장 5절을 「개역 한글판」으로만 읽는다면 만족은 하나님께로부터 온다고 말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다른 번역본들을 함께 읽는다면 개역 한글판의 번역이 적절하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이 본문에서 말하는 것이 사람의 만족이 아니라, 직분자의 자격임을 알게 될 것입니다. “만족”과 “자격”은 전혀 다른 것입니다. 그런데 개역 한글판만을 읽고 사람의 참된 만족이 하나님께로부터 온다고 설교한다면, 어찌되겠습니까?
이것은 한 가지 예에 지나지 않습니다. 이 세상에 완전한 번역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번역본에는 문제가 있기 마련입니다. 따라서 한 가지 번역본만을 가지고 설교하는 것은 물론, QT를 하거나 묵상을 하는 것도 위험합니다. 개역 한글판과 함께 다른 번역본들을 주의 깊게 살펴보아야 합니다. 번역본들의 번역이 일치하지 않을 때에는 원어 성경의 본문을 확인하고 번역이 달라진 이유를 밝혀야 합니다. 이런 과정을 통해서 우리는 성경을 올바르게 가르칠 수 있고 전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다음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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