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기고글] 반석이신 그리스도 - 한정건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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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석이신 그리스도
(고전 10:4 / 출 17:1-7)
성경에서 구약과 신약의 관계를 보면 구약에서 다가올 신약의 것을 내다보고 있으며, 신약에서는 구약이 바라본 것을 성취한다. 그래서 이러한 관계를 설명하는 방법 중 하나가 모형론(typology)이다. 구약은 모형(type)이고 신약은 실체(antitype)라는 것이다. 이것은 실제 지어질 집이 어떠할 것임을 미리 보여주는 모델하우스를 생각하면 쉽게 이해가 된다. 그래서 실체의 의미를 이해하려면 모형을 잘 연구해 보아야 한다.
고전 10:4은 구약의 사건을 회상하면서 이렇게 말한다.
다 같은 신령한 음료를 마셨으니 이는 저희를 따르는 신령한 반석으로부터 마셨으매 그 반석은 곧 그리스도시라
옛 출애굽 시절에 반석에서 물이 나왔는데, 그 반석은 예수 그리스도이고, 물은 예수님이 주시는 신령한 물이라고 한다. 이러한 적용이 모형론(typology)에 속한다. 우리는 이 본문을 잘 이해하기 위해 먼저 옛 이스라엘 백성이 반석에서 물을 먹은 사건을 자세히 살피고, 다음으로 그것이 신약에서 어떻게 성취되었는지 그 성취되는 모습을 살펴보고자 한다.
1. 모형인 구약본문의 이해
이스라엘이 출애굽하여 홍해를 지나 신광야에 있는 르비딤에 도착하였다. 그곳에 물이 없었고, 백성이 모세와 다투었다(출 17:2). 그들이 모세와 다툰 것은 하나님과 다툰 것으로 간주된다. 왜냐하면 모세가 그들을 인도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하셨기 때문이다. 17장 본문에 “다투다”라는 단어인 히브리어 리이브(byrI)와 “시험하다”라는 단어 나사아(hs;n:I)가 반복적으로 사용되는데(2, 7절), 이 두 단어는 법정에서 소송을 일으킬 때에 사용되는 것들이다(사 41:21 참조). 따라서 본문도 법정소송과 같은 개념으로 이해할 필요가 있다.
백성들의 고발 내용은 다음과 같다: ① “왜 물을 주지 않느냐?”(2절); ② “왜 우리를 인도하여내어 죽이려 하느냐?”(3절); ③ “하나님이 우리 중에 계시기나 하는가?”(7절). 하나님은 공개재판을 허락하였다. 법정이 열린 장소는 호렙산이었다(6절 상). 호렙산은 하나님 임재의 산이다(출 3장). 하나님은 모세에게 명령한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백성 앞을 지나가서 이스라엘 장로들을 데리고 하수를 치던 네 지팡이를 손에 잡고 가라(출 17:5).
모세가 지팡이를 손에 잡고, 장로들을 데리고 백성 앞을 지났다. 지팡이를 잡은 모세가 재판관이 되고, 장로들은 원고측이 되며, 하나님이 피고인이 된다. 모세와 장로들의 행진은 백성들에게 재판이 열림을 알리는 것이다. 매우 긴장된다. 그들이 이기지 못하면 무고죄로 당할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은 모세에게 “하수(나일강)를 치던 네 지팡이를 손에 잡고 가라”고 명령하셨다. 이집트에 내렸던 첫 번째 재앙에서도 하나님이 모세에게 아침에 지팡이를 잡고 강가에 가서 바로 왕을 만나라고 하셨다(출 7:15). 거의 사막지대인 이집트에서 나일강은 유일한 젖줄이다. 그래서 그들은 강을 하피라는 신으로 섬긴다. 바로는 이집트 최고의 제사장으로서 하피 신전에 아침제사를 드리러 올 때에 모세가 만난 것이다. 모세가 지팡이로 강물을 치니 물이 피로 변했다. 바로 하피 신이 심판을 받고 죽었음을 의미한다. 호렙산 법정으로 향하는 모세는 그 심판의 지팡이를 잡고 간 것이다.
호렙산에서 법정에 모세가 섰고 그 앞 한쪽에 장로들이 섰다. 드디어 상대방인 하나님께서 출두하신다.
내가 거기서 호렙산 반석 위에 너를 대하여 서리니(출 17:6).
하나님이 모세 맞은 편 반석위에 서셨다. 이제 재판이 시작된다. 그 결과가 어떻게 나타날까 긴장된다. 죄가 인정되는 쪽에 그 지팡이가 칠 것이다. 마치 나일강이 당한 것처럼. 하나님의 결심이 선포된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지팡이로 치라”고 명령한다. 이미 판정이 났음을 의미한다. 그런데 놀랍게도 하나님은 “반석을 치라”(6절 중)고 명령하신다.
너는 반석을 치라 그것에서 물이 나리니 백성이 마시리라(6절 중).
하나님이 선 반석을 쳤으니 하나님이 심판을 받은 것이다. 그리고 졌으니 백성이 요구하는 물을 주어야 한다. 어떻게 하나님이 재판에서 질 수가 있는가? 불의한 쪽은 저 이스라엘 백성이다. 그 불의한 장로들 앞에서 어떻게 하나님이 이러한 수모를 당하는가?
이것이 기독교의 진리이다.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사랑하셨기에 그들이 받아야 할 심판을 자기편이 대신 받게 하신 것이다. 그리고 그 반석에게 백성이 필요한 물, 바로 그들에게 생명을 주는 물을 흘러내게 하셨다.
2. 신약에서 어떻게 이루어졌는가?
고전 10:4은 그 반석은 “곧 그리스도”이며, 그 물은 “신령한 음료”라고 한다. 그러면 구약의 그 모형이 신약에서 어떻게 성취되었는가? 반석과 물, 그리고 예수님과 관계된 중요한 성경구절이 신약에 한 곳 더 있는데, 바로 요 7장이다.
명절 끝날 곧 큰 날에 예수께서 서서 외쳐 가라사대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요 7:37).
이 명절은 바로 초막절이다(요 7:2). 초막절은 옛 모세시대의 광야를 기억하는 절기이다. “명절 큰 날”은 초막절 마지막 날이다. 초막절 마지막 날에 있는 행사는 절기축제 기간 중 가장 중요하며 하이-라이트이다.
초막절 축제는 광야 반석의 물과 관계된 행사로 시작하고 또 끝을 맺는다. 첫날에 대제사장이 실로암 물을 두 항아리에 담아 안고 성전을 향하여 행진한다. 그 뒤로 제사장들과 유대인들이 행렬을 이루며 따라간다. 그리고 축제 기간 동안 그 물 항아리를 성전 안에 놓아둔다. 바벨론 탈무드 Sukkah, 486절에 초막절 행사 마지막 날 큰 행사를 다음과 같이 묘사한다. 백성들이 성전에 모이고, 대제사장이 두 물 항아리를 들고 성전 앞의 뜰에 있는 바위위에 선다. 백성들은 옛 광야를 생각하며 “목이 마르다, 시원한 물을 마시고 싶다”고 생각하며 반석을 쳐다본다. 대제사장이 물을 그 반석 위에 붓는다. 옛 모세가 반석을 쳐서 물이 흘러나온 장면을 재현해 보이는 것이다. 물이 반석을 타고 흘러내릴 때에 백성들은 환호하며 춤을 추면서 기뻐하고, 초막절 행사가 절정을 이루게 된다.
이 순간, 제사장이 항아리를 들고 나오기를 기다리며 사람들이 반석을 쳐다보며 목마르다고 생각하고 있는 그 순간에 예수님이 갑자기 그 반석위로 올라갔을 것이다. 그리고 주님이 외친다.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이 장면을 호렙산의 그것과 비교해 보자.
호렙산이 하나님의 산으로 불렸던 것처럼, 성전산도 하나님의 산이다.
호렙산에 반석이 있었던 것처럼, 성전 뜰에도 반석이 놓여있다.
옛날 그 반석 위에 하나님이 서신 것처럼, 성전 반석도 하나님이 임재해 계시는 성전 앞에 놓여있다.
옛날 반석에서 물이 흘러나온 것처럼, 반석이신 예수님께서 내가 물을 주겠다고 하신다.
초막절에 예수님이 반석에 서셨다. 옛 반석과 새 반석이 overlap 되고 있는 것이다. 바로 그 호렙의 장면을 여기로 옮겨 놓은 모습이다. 임무교대의 시간이 되었다. 옛 모형은 이제 그 사명을 다하고 참 반석에게 그 임무를 물러주려고 한다. 참 반석인 예수님이 선언하신다. “이제 내가 물, 참 생수를 주겠노라!” 실체가 참 반석의 역할 할 것임을 선언한 것이다.
그런데 옛날에 물은 그냥 흘러내렸던 것이 아니었다. 지팡이로 쳐야 했다. 모세가 반석을 친 것은 바로 심판을 의미했다. 예수님은 자신이 물을 주겠다고 할 때에 바로 자신이 심판을 받을 것도 포함하고 있다. 그 징계는 바로 자기 앞에 있는 백성의 죄를 위한 것이다.
요한은 예수님이 주시는 음료를 곧 그가 주실 “성령을 가리키는 것”이라고 주석을 달았다. 예수님은 자신이 떠나서 보혜사 성령을 보내어 주실 것이라고 하셨다(요 16:7). 오순절 성령은 그냥 하늘에서 내린 것이 아니다. 예수님이 심판받으셔서 죽으신 결과로 내려온 것이다. 이 성령은 신령한 음료이다. 옛 모세 시대 생수가 사람의 생명을 회생시켜주었지만 그러나 영원한 생명을 주지 못하였다. 오늘날 이 성령님은 우리 영혼의 생명을 영원히 회생시켜 줄 것이다.
우리는 자주 출애굽의 사건을 회상하자. 그리고 옛 반석에서 흘러내렸던 물을 기억하자. “야, 시원했겠다. 한번 마셔보았으면 좋겠다”고 갈망해 보자. 회개하고 세례를 받으면 “성령을 선물로” 받을 수 있다는 권면도 기억하자(행 2:38).
선지동산 57 게재 / 구약을 통한 신약읽기(4) / 한정건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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