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기고글] 놓치기 쉬운 개체교회의 선교적 책무 - 이신철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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놓치기 쉬운
개체교회의 선교적 책무
이신철 교수(선교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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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적으로 선교사를 파송하여 후원하는 것이 개체교회의 선교적 책무라고 생각한다. 한국교회는 1980년대부터 이런 선교적 책무에 대한 자각이 일어나 지난 30년 동안 수많은 선교사들을 파송하여 후원하였다. 그러나 개체교회의 선교에 대한 일차적 책무는 세상 속에서 성도들의 빛된 삶을 통한 증거에 있다. 필자는 개체교회의 선교적 책무를 세상 속으로 흩어져서 각자 자기의 맡은 일들을 하면서 살아가는 성도들과 관련하여 언급해 보고자 한다.
개체교회는 선교사를 파송하여 후원하고 있기 때문에 선교사를 감독하고 관리할 책무가 있다고 생각하기 전에, 먼저 생각할 것은 성도들을 세상 속으로 파송하였으므로 성도들의 증인의 삶을 돌아볼 책무가 있음을 인식해야 한다. 개체교회는 성도들이 모여서 하는 일만 아니라, 성도들 개개인이 흩어져서 하는 일에도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는 것이다.
교회나 선교회는 공통적으로 선교현지에서 자급, 자치, 자전 즉, 자립의 삼요소를 두루 갖춘 교회를 설립해야 한다는 것을 오래 동안 강조하였다. 그리고 선교현지에 자립교회가 설립되면 선교의 목표가 이루어졌다고 보고 철수해야 한다고 가르쳐 왔다. 자급하는 교회란 교회당을 짓거나 목사에게 사례를 주거나 교회를 운영하기 위해 외부로부터 지원을 받지 않아도 될 만한 교회를 의미하였다. 자치하는 교회란 현지의 원주민 성도들 가운데 지도자인 목사와 장로를 세워 성도들을 스스로 감독하고 치리할 만한 교회를 일컫는 것이었다. 그리고 자전하는 교회도 원주민 목사를 통하여 강단에서 말씀을 선포할 뿐 아니라, 전도인을 스스로 파송하여 전도하고 교회를 개척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어떤 분들은 여기에다 자선(自宣) 즉 스스로 선교하는 교회를 첨가하여 자립의 사요소를 말하기도 한다. 선교지에 교회를 세울 때에 처음부터 선교를 가르쳐 선교사를 파송할 수 있는 교회가 되게 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자립교회의 삼요소, 또는 사요소를 갖추어야 한다고 말할 때의 ‘교회’는 주로 회중으로서의 교회, 그리고 제도적 교회를 의미하였다. 그 삼요소, 또는 사요소를 성도들 개인에게 충분히 적용시키지는 않았던 것이 사실이다.
교회는 예배 회중으로서의 교회, 제도적 교회만이 전부가 아니다. 예배 회중이 교회의 기본적 모습이지만, 그 회중은 교회의 모일 때의 모습이고, 세상 속으로 보내심을 받아 흩어진 교회는 성도 개개인의 빛과 소금의 삶의 모습으로 나타난다. 교회의 조직은 당회로 완성되는 것이 핵심이지만 전부가 아니고, 세례를 받아 교회의 일원이 된 성도들 개인으로 구성되는 것이 더 기본이다. 같은 맥락에서 개체교회의 선교책무는 선교사를 보내고 기도하며 후원하는 것 정도로 한정되는 것이 아니고, 성도들을 그리스도의 제자로 양육하여 세상 속으로 파송하고 기도하며 돌아보는 데까지 나아가야 한다. 교회의 선교책무는 선교지로 파송받은 선교사들에게만 지워진 것이 아니라, 이웃과 사회 속으로 파송받은 성도들 개인에게도 주어진 것이다. 성도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라고 한다면 그들은 배움의 현장(現場)으로 모이는 교회에 속할 뿐 아니라, 파송의 현장으로 흩어지는 교회에도 속하여야 한다. 그러므로 개체교회의 선교책무는 성도들 개인에게까지 미친다는 사실을 좀 더 철저하게 인식해야 할 것이다.
자립의 요소들을 성도들 개인에게 적용해 보자. 성도들은 자기와 가족이 쓸 것을 마련할 뿐아니라, 남을 구제할 것이 있게 하기 위하여 세상 속에서 손으로 수고하여야 한다. 하지만 직업을 통한 자급만이 성도의 삶의 전부가 아니다. 세속에 물들지 않고, 자기와 가정의 믿음을 지킬 뿐아니라, 이웃을 사랑하며 시민으로서 사회적 문화적 책임을 다하여야 한다. 하지만 사랑의 봉사를 통한 자치만이 성도의 삶의 전부가 아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보내심을 받은 대사요 증인으로서 불신자들에게 복음을 전파해야 한다. 자급과 자치와 함께 전도를 통한 자전이 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성도들을 증인으로 세상으로 보내신 뜻이 온전히 이루어진다.
세상 속으로 흩어진 성도들이 하는 일들은 교회의 영역 밖에서 일어나는 일들이라고 하여 교회가 관여하지 않는다고 하는 것은 선교 책무적 관점에서 본다면 옳지 않다고 생각한다. 성도들이 세상 속으로 그냥 흩어진 것이 아니다. 그리스도께서 성도들에게 선교적 임무를 부여하여 세상 속으로 파송하신 것이다. 예배자로 모인만큼 증인으로 흩어진다. 좀 더 실감있게 표현한다면, 그리스도의 영적 임재 가운데 성만찬을 함께 나누면서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오실 때까지 전하는 일을 위해 파송을 받는다고 말할 수 있다. 따라서 교회는 성도들이 세상에서 그리스도의 증인으로 자립하기까지 양육할 뿐 아니라, 그들의 선교적 책무를 신실하게 잘 감당할 수 있도록 돌아보고 점검할 필요가 있다. 필자는 한국교회들이 지난 40여 년 동안 성도들을 불러 모으는 데에는 힘썼으나, 그 성도들을 세상 속으로 파송하여 흩어진 곳에서 선교적 책무를 잘 감당할 수 있도록 지도하고 후원하며 감독하는 일에 대해서는 상대적으로 많이 미흡하였다고 본다.
통전적 선교론이 널리 퍼진 이후로 한국교회도 지역사회에 대한 봉사적 책임을 크게 강조하고 있다. 그에 따라 다양한 지역 봉사 또는 복지 프로젝트를 교회가 직접 시작하기도 하고, 사단법인을 만들어서 교회의 병행기관으로 운영하기도 한다. 어린이집, 방과후교실, 독서실, 도서관, 그룹홈, 학사관, 문화센터, 복지센터, 대안학교, 장애인 돌봄, 노인대학, 노인 요양센터, 등 다양한 분야의 활동이 개체교회의 주도하에 폭발적으로 증가하고 있다. 특히 국가가 다양한 사회복지기관에게 지원금을 제공함에 따라 재정적 부담을 크게 가지지 않고도 이런 봉사활동을 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에 많은 크고 작은 개체교회들이 더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있는 것 같다.
교회가 이런 봉사 프로젝트들을 공적으로 직접 운영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는 한 때, 복음병원이나 고신대학교를 교단이 직영할 수 있느냐 하는 문제와 상관되어 있다고 생각한다. 우리 교회의 사회적 환경이 기독교국가의 배경을 가진 서구 교회들과는 다르므로 교회가 그런 교육 또는 봉사기관을 전혀 직영할 수 없다고 단언할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교회가 복지, 교육, 봉사기관을 직영한다고 하더라도 거기에 참여하는 성도들이 직접 운영할 수 있기까지 일시적이고, 초기적인 일이 되어야 할 것이다. 교회가 언제까지나 그런 기관들을 직영한다고 하는 것은 성도들의 선교적 책무의 자립을 가로막는 일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개체교회는 성도들이 각자 자기의 위치에서 선교적 책무를 자립적으로 잘 감당할 수 있도록 구비시키고, 돌아보고, 지도하는 일에 좀 더 체계적인 노력을 기울여야 할 것이다.
63호 선지동산 게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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