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기고글] 기품 있는 교회와 실천신학적 지혜 - 하재성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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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회적대화⑥
기품 있는 교회와 실천신학적 지혜
하재성 교수(실천신학)
몇 년 전, 미시간 어느 도시에서 지난 100년간 주도적인 역할을 해 오던 교회 하나가 문을 닫게 되었다. 그러면서 3백만 달러(30여 억원)에 이르는 교회당을 어떻게 처리할 것인지 고심하였다. 그동안 교인들은 그 도시의 가장 윤택한 주택지역에서 이 아름다운 교회당을 지어 신앙생활을 해 왔다. 하지만 미국의 여느 도시와 다름없이 흑인과 히스패닉 거주지가 점점 확대되면서, 성도들은 한 가정씩 교회에서 떨어진 먼 곳으로 이사를 가게 되었다. 젊은이들은 고향을 떠났고, 교회 리더들은 점점 나이가 들어갔다. 그나마도 이제 몇 가정 남지 않아서, 교회는 문을 닫고, 각기 자기가 사는 지역에 속한 여러 교회로 흩어져서 신앙생활을 하기로 결정하였다.
다만 아직 남아 있던 사람들은 이 큰 교회당을 어떻게 처리할지 고민하였다. 사실 그 교회당에는 큰 파이프 오르간이 설치되어 있고, 교회당은 여전히 크고 고풍스럽다. 스테인드글라스도 교회당의 고풍스런 분위기를 더했다. 교회당에 연결된 부속 공간도 매우 넓었고, 주차장 공간도 크다.
오랫동안 기도하고 고민한 끝에 이들은 모일 공간이 없는 그 지역 한인교회에 교회당을 넘겨주기로 결정했다. 가격은 고작 1달러(천원)였다. 몇몇 다른 후보 교회들도 있었지만, 교회의 선교적인 사명을 가장 잘 감당할 잠재력이 있고, 교회당을 깨끗하게 보존하며 섬길 수 있는 그런 교회를 찾다보니 100여명 남짓 되는 이 한인교회를 선택하게 된 것이었다. 1달러를 받은 이유는, 만일 무상으로 넘겨주게 되면 한 박스 분량의 서류를 작성해야 하는 반면에, 1달러 받고 팔면 한 장의 계약서로 모든 문제가 해결되기 때문이었다.
“신학과 실천은 어떤 관계가 있는가?” 이것은 오랫동안 신학자들과 목회자들을 괴롭혀 온 매우 중요한 질문이다. 대개 전통적으로 신학의 실천이라 할 때는 목회자들의 목회 활동에 제한하여 이해해 왔다. 이를 가리켜 목회적 패러다임(clerical paradigm)이라고 부른다. 지난 300년간 목회적 패러다임은 목회자가 성도들을 어떻게 돌보아야 하는지에 대한 기술적(technological) 접근에 집중해 왔다. 그것은 곧 실천신학이란 이론신학을 적용한 것이라는 명제에서 발달해 온 것이다.
하지만 위에서 말한 미국 교회가 30억 원이라는 큰돈을 포기하고, 그 지역의 소수민족 교회인 한인교회에 교회당을 거저 준 과정을 보면, 신학의 실천이란 것이 단순히 진리의 적용 그 이상의 차원인 것을 볼 수 있다. 왜냐하면 이들의 놀라운 실천은 신앙 양심과 건전한 신학에 기초해 있으면서도, 동시에 현재의 상황에 대한 철저하고 깊은 이해에 기초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목회적 패러다임을 넘어 사회적 도덕과 정의에 까지 영향을 미친 중요한 사건이었다.
그 중 몇 가지 실천의 차원들을 살펴보자면 다음과 같은 예를 들 수 있을 것이다. 첫째 이 교회는 교회와 교회당 건물에 대한 자신의 고유한 신학을 따라 생각하고, 그 신학의 전통을 실천하였다; 둘째, 이 교회는 신학을 윤리적으로 실천하였다; 셋째 이 교회는 후보 교회들에 대한 매우 현실적이고 철저한 이성적 판단력으로 신학을 실천하였다; 넷째, 돈의 유혹을 이기는 투명성과 공공성을 끝까지 유지함으로써, 선교와 사회봉사의 차원에서까지 신학을 실천하였다.
첫째, 이 교회는 개혁교회의 일원으로서(Christian Reformed Church in North America) 개혁신학적인 사고를 함으로써 신학을 실천하였다. 개혁교회는 중세교회의 그릇된 신학에 대한 비판에 근거하여 세워진 신학과 교회이다. 중세교회는 교회당을 짓기 위해 죽은 영혼들을 돈으로 사고파는 범죄를 저질렀다. 지금까지도 그렇게 비싼 돈과 오랜 세월에 걸쳐 지은 유럽의 교회 건축물들은 교회의 본래 기능을 잃은 채 비어가고 있다. 한국의 일부 교회들 역시 자신의 세대에 그럴듯한 교회 건물을 짓거나, 다른 교회 못지않은 인테리어를 하기 위해 천문학적인 돈을 들인다. 교회나 교회당에 대한 신학적 판단에 근거하기보다 중세 교회와 같은 가시적이고 외적인 요소들이 두드러진다. 하지만 이 교회는 헌신과 사랑과 추억이 담긴 교회당을 무상으로 소수민족 교회에 증여함에 있어서, 자신들이 믿는 교회의 가치와 교회당의 개혁신학적 의미를, 진지한 실천을 통해 선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둘째, 이 교회는 교회의 품위와 인간의 가치를 돈 보다 더 소중하게 여기는 윤리적 실천을 하고 있다. 신학자 단 브라우닝(Don S. Browning)은 실천신학이 다원주의적 사회 및 불신자의 세계와 소통하기 위해 본질적으로 윤리적이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는 많은 한국교회들이 결정적으로 상실한 실천신학적 요소이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큰 교회당을 지으려다 부도를 내는 일이나, 불법을 개의치 않고 한국 사회의 건축 관행에 기대어 자신들의 이익을 눈감는 것은 실천에서의 윤리성을 상실한 것이다. 인간과 교회에서 윤리란 두 번 이상의 깊은 생각과 자기반성, 자기 통제와 자기 부인을 통해 비롯되는 결정적인 가치이다. 결국 많은 부분에서 한국교회는 한국사회와 윤리적 소통을 하는데 실패하고 있다. 교회가 신학을 실천할 때, 학문과 경험으로 발전되어온 윤리적 사고와 실천을 함으로써, 믿지 않는 현대인들에게까지 설득력 있는 선택을 해야만 한다.
셋째, 이 교회는 이 실천에 있어서 이성과 합리성을 중시하였다. 그들은 결코 주먹구구식으로 ‘은혜롭게’ 일을 처리하지 않았다. 자신들이 지켜온 소중한 교회당을 무상으로 증여함에 있어서 매우 이성적이고 분별력 있게 일을 처리하였다. 이를 위해 구성원들간의 합리적인 의사소통, 교단과 전문가들의 자문, 그리고 후보자들에 대한 엄선의 과정을 거쳤다. 위의 한인교회 이외에 다른 한 교회도 이 교회당을 얻기 위해 지원을 했지만, 그들은 이미 이전에 다른 건물을 빌리고서도 제대로 관리도 하지 않았고, 또 관리할만한 재정적인 여유가 없었기 때문에 거절되었다. 비록 너그러움과 사랑에서 이 일이 시작되었지만, 이 교회는 철저하게 이성적으로 사고하였다. 바른 선택을 하기 위해 오랜 시간을 서로 함께 대화하였다. 그리고 여러 지원서들을 꼼꼼히 살피고, 교회 현장을 철저히 조사함으로써 자신들의 선한 의도가 가치 있게 실현되도록 노력하였다. 이성적 사고와 합리성은 구성원들 사이의 소통, 소수 의견의 존중, 직분자들에 대한 신뢰, 그리고 객관적인 판단과 선택에 기초한다. 신학의 실천은 합의된 합리성을 존중한다.
넷째, 이 교회는 남은 재정과 재산에 관한 한 철저하게 투명성과 공공성을 유지하고 있다. 교회 헌금과 재산은 하나님의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길에서 박스를 줍거나, 식당에서 밤새 일을 하여 얻은 수입을 구별하여 하나님께 드린 싱글 여성들의 피땀어린 소중한 렙돈들도 포함하고 있다. 그럴수록 교회의 재정결정권을 가진 당회나 공동의회, 지도자나 재정관리자들은 재정을 투명하게 사용하고, 그 목적이 교회와 이웃을 위한 공공의 목적에 부합하도록 관리해야 한다. 인간은 돈의 유혹에 취약하다. 이 교회는 문을 닫으면서 30억 가치의 교회당, 그리고 남아 있는 수억의 현금 자산을 열악한 형편에 있는 다른 교회와 이웃을 돕기 위해 모두 소진하고, 그 가족들은 각각 여러 다른 개혁교회들로 편입하였다. 윤리성의 연장 차원에서 이들은 재정에 관한 투명성과 공공성을 실천하였다. 이로써 교회의 목적인 선교와 사회봉사의 차원에서까지 신학을 실천하였던 것이다.
실천신학을 단순한 적용신학이라고만 생각한다면 교회는 뱀처럼 정교한 실천적 지혜를 요청하는 현대사회에서 고립될 수밖에 없다. 실천적 지혜는 개혁신학적 사고와 더불어 윤리성과 합리성과 사회 봉사적 차원을 요청한다. 이에 따라 교회는 매우 신중하고 정교한 분별력을 갖추어야 한다.
하지만 단적인 예로 세월호 사건에 대한 설교답지 않은 설교, 인간 가치에 대한 무지 등은 한국교회의 실천신학적 지혜의 결핍을 고스란히 드러내고 있다. 우선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우는 자들과 함께 울라”는 가장 기본적인 성경의 가르침을 잊은 채, 애도는 하지 않고, 그저 자극적인 소재로 삼아 일방적으로 가르치거나 의미를 해석하려고만 덤비고 있다. 실천신학을 잃은 한국교회는 애도마저 잃었다. 안타깝게도 한국교회는 이 사회의 슬픔이나 아픔조차 품지 못한 채 사회적 정서로부터 점점 고립되고 있다. 이것은 끔찍하리만치 암울한 한국교회의 미래를 예고한다. 이제라도 교회는 윤리적인 생각, 사회 속에서 교회가 보여주어야 할 공공성, 불의와 탐욕에 대한 경고, 생명의 상실에 대한 깊고 진실한 애도, 재발 방지를 위한 국가의 감시 등등, 구체적이고 실천신학적인 지혜를 회복함으로써, 썩어가고 무너져가는 세상을 변화시키는 소금의 맛을 속히 회복해야만 할 것이다. 기품 있는 교회는 실천적 지혜를 가진 교회이다.
66호 선지동산 게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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