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기고글] 경청과 충고의 비율 50:10 - 하재성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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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청과 충고의 비율 5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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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재성 교수(실천신학)
경청과 충고의 비율은 50:10이 바람직하다. 상대방의 이야기를 50분 들어 준 이후 남은 10분간 분석과 판단과 충고를 하는 것이 사람을 바꾸는 시간의 비율이다.
우울하고 힘든 사람에게 이해와 공감으로 경청하는 것은 곧 치료를 뜻한다. 어린 나이에 아버지의 죽음을 목격한 충격, 커서 동생의 죽음까지 목격해야 했던 한 젊은 형제의 슬픔, 잠 못 이루는 불편과 불안이 점점 사라지게 된 것은 그를 존중하여 듣는 경청이 있었기 때문이다.
아버지에 대한 공포와 삶의 혼란으로 자살충동을 느끼던 한 젊은 자매가 다시 새로워진 마음으로 담대한 의욕을 가지고 세상에 나갈 수 있는 것도 그의 존재의 중요성을 인정해 주고, 말 한 마디 한 마디에 귀를 기울이는 공감이 있기 때문이다.
우울한 형제들은 분노를 쌓아 놓는다. 누군가가 잘못 건드리기만 하면 그 분노는 다른 사람들을 향하여 폭발하게 된다. 그렇게 분노할 수밖에 없는 이유를 조심스럽게 들어주는 상담자는 내담자의 인생과 사회에 대하여 폭발물을 안전하게 처리하는 사람들이다.
“그렇군요. 정말 형제의 이야기를 듣고 보니 그렇게 분노가 일어날 만했겠습니다!”
상담자는 결코 모든 분노를 합리화시키지는 않는다. 옳다고도 하지 않는다. 하지만 내담자의 상황에서 분이 날 만한 이유가 있다면 인정해 준다. 분노했다는 “사실”을 받아들인다. 그리고 분노한 사람을 있는 모습 그대로 받아줌으로써 그 위험한 압력을 감소시킨다.
우울한 자매들은 자신을 향하여 실망하고 분노한다. 하는 일마다 자기 때문에 안 된다고 자신을 공격한다. 한심하고 무가치하다고 말한다. 차라리 죽는 게 더 낫다고 이야기한다.
상담자는 “얼마나 힘들었으면 그렇게까지 생각하게 되었는지 마음이 아프다”고 말한다. “결코 무가치하지 않은 이유가 너무나도 많은데, 그만큼 느끼게 된 이유들 때문에 죽을 생각까지 했다니 너무 마음이 아프다”고 공감한다.
상담자는 우울증 환자에게 결코 호통치지 않는다. “자살은 나쁜 죄”라고 충고하거나 권면하기 전에, 그런 생각이나 감정을 가지게 된 것에 대해 함께 마음아파 한다.
목회 상담자는 바른 가치관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그래서 궁극적으로 내담자와 성도들을 바른 길로 이끌어야 할 책임이 있다. 자살이 가장 악한 죄 가운데 하나라는 것을 궁극적으로 자기 스스로 고백하도록 이끌어 주어야 한다. 그러나 그 이끌어 주는 과정에서는 충고와 판단을 보류한다. 먼저 내담자와 마음을 함께 해야만 그의 진정한 변화를 기대할 수 있기 때문이다.
공감은 마음의 주파수를 맞추는 일이다.
공감은 상대방의 신을 신고 걸어보는 것이다. 어릴 때 엄마 아빠의 신을 신어보았을 때, 큰 느낌, 불편함, 그리고 신기함이 함께 있었을 것이다.
공감은 상대방의 마음에 들어가, 그 사람의 감정을 대신 느끼는 것이다.
공감은 기억에서 나온다. 내가 겪었던 비슷한 일에 대한 감정으로 상대방에게 다가가는 것이다. 칼빈이 아브라함의 아내를 잃은 사건을 주석하면서, 그는 자신의 아내를 잃은 기억을 떠올리며, 그 슬픔이 말로 할 수 없는 일임을 설명하고 있다.
공감은 감정의 상상력에서 나온다. 우리는 다른 사람이 겪은 일을 다 겪어 볼 수는 없다. 알코올 중독 남편을 가진 여성의 마음을 우리는 경험해 보지 않아서 모른다. 그러나 상상할 수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 물어볼 수 있다.
“알코올 중독자의 아내가 된다는 것은 어떤 것입니까?”
“남편에 대해, 그를 돌보아야 하는 아내로서 어떤 마음이 드십니까?”
그러므로 최고의 공감의 방법은 본인의 마음을 직접 물어보는 것이다. 그리고 고개를 끄덕여 주는 것이다. “그러시군요! 남편에게 언제 어떻게 쓰러질지 몰라 많이 불안하시군요!”
지독하게 말을 듣지 않고 거꾸로만 가는 사춘기의 딸, 일마다 기대마다 반대로 가는 모습에 분노하고 답답한 어머니에게, “정말 화가 나고 답답하셨겠어요!”
내담자의 언어 표현을 짧게 반복해도 좋다.
내가 조금 덧붙여도 좋다.
그러나 상담자라고 항상 정확하게 감정을 공감해 주지 못할 때도 있다. 괜찮다.
“그렇게 답답한 건 아닌데, 사실 걱정되죠. 자기 고집대로 밤늦게 혼자 운동하러 다니니...”
“네, 답답한 것보다 걱정이 많이 되신 거네요!”
감정을 터치하면 영혼을 터치할 수 있다. 그것은 예일대학교에서 강의했던 유명한 목회상담학자 제임스 디터스의 말이다. 상담자가 자신의 마음을 이해하고 있는 그대로 수용하는 것을 보면 내담자의 마음은 더욱 깊은 곳으로 함께 탐험해 가기 때문이다.
그런 후, 남은 10분간, 이제는 상담자가 가진 신앙과 신학을 따라,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경험과 지혜를 따라 이끌어 주어야 한다. 칼 로저스는 이것을 하지 말라 했다. 그러나 목회자는 해야 한다. 우리에게는 신학의 자산이 있고, 성경과 성령의 지혜가 있다. 바르게 판단하고, 바르게 이끌어 주어야 한다.
어느 신학생이 자신의 중국 유학과 한국에서의 경험에 대하여 이야기했다. 자신에게 친한 사람이 많지 않은데, 자신이 친해져서 형이라 부르면 얼마 지나지 않아 그 사람은 죽었다는 것이다. 그게 벌써 두 세건 되고, 그러다 보니 사람을 만날 때 친해지거나 형이라 부르기가 두렵다고 했다.
그런 일이 생겨서 마음이 어떠했느냐는 감정의 탐색, 정말 두렵겠다는 공감이 먼저 이루어졌다. 그런 후에는 신학적인 우상 파괴와 재건의 작업이 이루어졌다.
사람의 살고 죽는 것은 하나님의 뜻 안에서 이루어지는 것이지 결코 그가 형이라고 불렀기 때문이 아니다. 그런 우연의 일치는 일어날 수 있지만, 그 사람들의 죽음의 직접적인 원인이 결코 될 수 없기 때문이다.
만일 그가 형으로 불렀기 때문에 사람이 죽는다고 믿는다면, 그는 자신에 대한 과대한 망상을 가질 수 있다. 자기가 사람의 생사를 결정할 수 있는 것처럼... 이런 우상은 깨어져야 한다.
그 우상을 깨기 위해, 선별적으로 사람들을 형이라 부르지 말고, 그 반에서 자기보다 나이가 많은 모든 사람들을 형이라 부르도록 격려했다. 누가 누구를 형이라고 부른다고 사람이 죽는 법은 결코 없다.
부모에게 욕설을 할 만큼 잘못된 행동을 할 때, 부모가 그 아이의 행동을 용납해서는 안 된다. 부모의 마음을 공감하지만, 당분간 그 아이가 스스로 깨달을 때까지 부모는 단호한 태도를 취할 것을 요청하는 것이 상담자의 일이다.
성급하게 끼어들어 충고하고 끝내려는 것은 미성숙한 상담이다. 마음의 말들, 감정의 언어들에 집중하면서, 묻고, 공감하고 50분을 지낸 후에, 남은 10분 충고로도 너무나 충분하다.
63호 선지동산 게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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