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기고글] 사랑의 강권 - 박영돈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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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강권
선지동산 46호 게재 / 성화의 복음(6) / 박영돈 교수
계속되는 칭의
한국교회가 그동안 칭의 교리를 지나치게 강조했기에 교인들의 윤리적 수준을 저하시켰다고 주장하는 이들이 있는데, 사실 한국교회의 문제는 칭의를 너무 많이 전한데 있는 것이 아니라 칭의를 바르게 전하지 못한데 있다. 칭의에 대한 올바른 가르침과 이해는 항상 성화를 증진시킨다. 그것은 칭의가 성화의 참된 바탕과 원동력을 제공하기 때문이다. 성화의 진전은 오직 칭의의 바탕 위에서만 가능하다. 성화가 진행됨에 따라 칭의의 단계를 벗어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성화의 전 과정은 칭의에 의존한다. 신자가 아무리 높은 거룩의 경지에 이르렀을지라도 칭의의 바탕을 떠나서는 한순간도 바로 설 수 없다.
이런 의미에서 칭의는 즉각적인 동시에 계속적이다. 이는 성화와 같이 칭의가 점진적으로 완전하여진다는 것을 뜻하지 않는다. 신자는 예수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즉각적으로 완전한 칭의의 은혜를 받았다. 라일 감독이 지적했듯이, 비록 “하늘에 있는 성도라 할지라도 지상에 있는 신자보다 더 많이 의롭게 되지 않았다.”(J. C. Ryle, Holiness(London: James Clarke, 1956), p. 330.) 그러나 칭의는 구원의 문으로 진입하는 은혜만이 아니라 신자의 삶 전 과정을 힘차게 떠받치고 있는 영원한 은혜의 반석이다.
신앙의 여정에서 칭의의 진리는 우리가 항상 불변하는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사랑 안에 살고 있다는 것을 거듭 확인시켜 준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사랑을 얻기 위해, 또는 다시 회복하기 위해 우리가 부단히 애쓰고 수고해야 하는 율법적 강박에서 자유하게 한다. 비록 우리가 죄 속에 빠져 영적으로 방황할 지라도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사랑은 전혀 변함이 없다. 그러기에 하나님의 사랑을 배반한 죄 값을 자신이 스스로 치르고 그것을 보상하려는 헛된 수고를 그치고 두 손 들고 나아가 이 사랑을 다시 의지하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받아 주신다.
제2의 찬스를 주는 칭의의 은혜
이러한 사실을 일깨워주는 칭의의 메시지는 우리를 타락에서 돌이키는 가장 효과적인 은혜의 방편이다. 칭의는 신자가 영적 침체에서 헤어나 다시 회복할 수 있는 견고한 영적인 바탕을 제공한다. 신자가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 가운데 다시 시작할 수 있는 제2의 찬스를 끊임없이 부여한다. 그래서 범죄한 자기 백성을 부르시는 하나님의 말씀에는 항상 칭의의 복음이 담겨 있다. 구약의 선지자들은 타락한 백성들의 죄에 대한 하나님의 경고와 징계에 대한 말씀과 함께 위로와 사유를 약속하는 칭의의 메시지를 전하였다. 하나님께서는 범죄한 그의 백성을 엄중하게 징계하셔서 정신 차리고 회개하게 하시는 동시에 칭의의 메시지로 그들을 위로하신다.
죄를 지적하며 책망하는 설교만으로 타락한 이들을 돌이킬 수 없다. 그들의 사악한 죄악에도 불구하고 그들을 향한 하나님의 지극히 큰 사랑은 변함이 없다는 사실을 성령의 감화로 다시 깨닫게 될 때 그들은 사랑하는 아버지 품으로 돌아오게 되는 것이다. 교회역사 속에서 주기적으로 나타난 부흥의 시기에 다시 부활했던 메시지는 죄에 대한 날카로운 지적과 함께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강조한 칭의의 복음이었다. 지금은 그 어느 때보다 부흥의 도래가 절실히 필요한 시기이다. 그만큼 우리 한국교회에 시급하게 요구되는 것은 진정한 회개와 칭의를 전하는 설교가 부흥하는 것이다.
십자가와 성령
교회역사 속에 항상 그래 왔듯이, 칭의의 교리는 자칫 잘못하면 남용되기 쉬운 위험한 교리가 될 수 있다. 성령의 은혜 없이 메마른 이론으로만 칭의의 진리를 전할 때 그런 메시지는 죄인의 심령을 변화시키기보다 오히려 죄악을 심상히 여기게 하는 교리로 오용되기 쉽다. 개신교가 말씀과 성령의 긴밀한 연결성에 대한 중대한 통찰에 있어 소홀함에 빠지면서 개신교 강단이 말씀의 불씨를 지피는 성령의 불길을 잃고 이론적으로 바른 교리에만 매달리는 주지주의적이고 교조주의적 경향으로 치우칠 때가 많았다. 그 결과 오늘날 수많은 개신교 신자들이 은혜에 대한 건전한 교리를 가지고 있지만, 그 교리가 가리키는 실체인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의 부요함을 삶 속에서 체험하며 누리지 못하고 있다. 곧 은혜의 교리가 “다 머릿속에만” 갇혀 있고, 우리의 전 인격과 삶을 관통하여 우리의 전존재를 바꾸어 놓는 능력 있는 말씀으로 역사하지 못한다.
복음사역의 두 축은 십자가의 도와 성령이다. 십자가를 통해 밝히 계시된 죄인을 향한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와 사랑에 대한 설득력 있고 논리적인 진술과 함께 이 십자가의 도가 증거하는 사랑과 은혜의 실체를 죄인의 심령에 체험적으로 와 닿게 하는 성령의 사역이 한데 어우러질 때 효과적인 복음 사역을 낳는다. 십자가를 통해 계시된 하나님의 사랑을 성령의 감동으로 전파할 때 죄인은 자신의 죄인 됨을 깊이 자각하고 그런 죄인을 사유하고 받아 주시는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에 압도된다. 이 큰 하나님의 사랑이 성령으로 말미암아 그들 마음속에 부은바 될 때 죄인들은 복음에 설복된다. 이 하나님의 사랑만이 죄인들을 구원할 수 있는 비결이며 그들의 강퍅한 마음을 녹이는 능력이다.
사랑의 다이내믹
우리는 변치 않는 하나님의 사랑 안에 계속 살고 있다. 그런데 왜 이 사랑이 머릿속으로 만 이해되고 가슴에 와 닿지는 않는가? 어떻게 칭의 교리가 말하는 놀라운 사랑의 실체가 우리 마음에 체험되며 우리 삶을 움직이는 추진력으로 작용될 수 있는가? 그것은 성령의 사역으로 가능하다. 성령은 사랑의 영이다. 성령은 하나님의 사랑을 우리 영혼 안에 깊숙이 스며들게 하여 우리의 전존재와 인격이 이 사랑에 흠뻑 젖게 한다. 그래서 바울사도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바 되었다고 하였다(롬 5:5). 성령충만은 이 사랑의 영으로 충만함을 의미한다. 우리가 두려움으로 가득하면 두려움이 우리를 사로잡고 지배하듯이 우리가 성령으로 충만하면 하나님의 사랑에 사로잡힌다. 그리고 그 사랑이 우리 삶을 지배하는 강력한 영향력으로 작용하여 그 사랑의 강권함에 이끌림을 받으며 살게 된다. 이렇게 우리의 심령이 하나님의 사랑에 매료되고 우리가 이 사랑에 사로잡힌바 되면 어찌 거룩하게 살지 않을 수 있으랴.
간혹 하나님의 사랑을 전하는 설교보다 죄책감과 두려움을 불러 일으켜 하나님의 말씀에 복종하게 하고, 거룩하게 살도록 독려하는 윤리적 설교가 더 효율적으로 보이기도 한다. 물론 신자의 삶 속에 두려움과 죄책감이 필요할 때가 있다. 그러나 두려움과 의무감에 이끌리는 삶 속에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순종과 거룩함의 열매를 맺을 수 없다. 하나님의 사랑만큼 인간의 마음을 움직이는 강력한 힘이 없다. 두려움이나 죄책감은 결코 이 사랑만큼 강한 힘이나 순수한 동기가 되지 못한다. 하나님의 사랑만이 우리를 얽어매는 율법주의의 사슬을 깨뜨릴 수 있는 강력이며, 범죄를 불가능하게 하는 유일한 비결이며, 우리를 죄책감과 두려움에서 해방하여 진정한 거룩을 추구하게 하는 원동력이다. 그러므로 율법주의의 위험을 극복하는 가장 강력한 대책은 은혜의 교리와 성령 충만의 은혜를 잘 접목시킨 설교사역을 통해 신자들이 하나님의 사랑에 강권함을 받는 삶을 살도록 인도하는 것이다. (다음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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