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기고글] 완전 성화는 가능한가? - 박영돈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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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전 성화는 가능한가?
제2의 축복을 주장하는 이들은 이 은혜를 체험한 후에는 우리가 다시는 죄와 침체의 수렁으로 미끄러져 떨어질 수 없는 영적 고봉에 계속 머무르게 될 것처럼 말한다. 마치 영 단번에(once-and-for all) 약함과 패배와 탄식의 삶이 능력과 승리와 기쁨의 삶으로 바뀌게 될 것같이 말한다. 과연 그러한 삶이 가능한 것인가? 전통적인 입장은 이에 대해 매우 부정적이다.
칼빈은 “거듭난 자 안에도 연기가 피어오르는 탄 재와 같은 악이 남아 있어서 끊임없이 그를 죄 짓도록 유혹하고 자극한다”고 했다. 그래서 신자는 죄의 세력으로부터 구원하는 성령의 은혜를 받았지만, 그는 결코 죄에 대한 완전한 승리와 모든 약함으로부터 자유를 누리는 단계에 이를 수는 없다. 신자의 최선의 행위도 여전히 죄의 자국으로 얼룩져 있기에, “이생의 가장 탁월한 최상의 상태마저도 오직 하나의 과정에 불과할 따름이다.”
이런 칼빈의 가르침을 따라 칼빈주의 신앙고백서들은 성화의 불완전성을 크게 부각시켰다. 웨스트민스터 대요리문답은 십계명을 자세히 해석하면서 신자는 이 계명을 철저히 지키는 삶을 살아야 한다고 역설한다. 그리고는 지금까지 강조해 온 것을 깡그리 부인하기라도 하듯이 이렇게 결론짓는다. “자신의 힘으로나, 이생에서 받은 어떤 은혜로 하나님의 계명들을 완전하게 지킬 수 있는 이는 아무도 없으며, 우리 모두는 매일 생각과 말과 행동으로 이것을 범할 뿐이다.”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에서도 이와 비슷한 언급을 발견할 수 있다. “이 생에서는 가장 거룩한 사람일지라도 이 순종의 미미한 시작만을 했을 뿐이다.”
이런 표현은 성화에 대해 매우 부정적이고 회의적인 것처럼 들린다. 자연히 많은 의문과 반론을 불러일으킨다. 안토니 후크마는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의 표현방식에 대해 불만을 토로하며 이렇게 반문한다. “만약 가장 거룩한 사람마저도 다만 순종의 작은 시작밖에 할 수 없다면, 어떻게 신자가 자신에 대해 부정적인 자아상을 갖지 않을 수 있겠는가?” 후크마의 지적대로, 이런 신조의 진술에 의하면 거룩함의 성취도와 죄로부터의 구원에 대한 기대치가 너무 낮다는 인상을 피할 수 없다. 또한 아무리 힘써도 지키지 못 할 것을 애써 지키려고 노력할 필요가 꼭 있느냐는 자포자기적 심리를 조장할 수 있다. 교육심리학적으로 매우 부정적 영향을 끼칠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신자들을 낮은 윤리적 수준에 만족하게 하며, 거기에 안주케 하기 쉽다. 더불어 거룩함을 간절히 추구하는 이들은 이런 전통적인 가르침에 실망하여 좀 더 나은 성화론을 찾아 방황하게 된다. 그 대표적인 예가 웨슬리라고 할 수 있다.
완전주의
웨슬리가 특별히 그리스도인의 완전을 추구하게 된 배경에는 성화의 불완전성을 강조하는 전통적인 교리에 대한 그의 불만이 깔려 있었음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는 불완전 교리가 거짓된 삶을 합리화하는 방편으로 남용되는 것을 염려하였다. 칼빈주의에서 가르치듯이 하나님의 계명을 결코 온전히 지킬 수 없으며 죄를 지을 수밖에 없다는 고정관념은 “우리의 부패한 마음에 온갖 종류의 합리화”를 제공한다. “얼마나 우리 마음은 항상 준비된 핑계로서 이 ‘어쩔 수 없음’(inevitability)에 초점을 맞추기가 쉬운가? 도저히 이룰 수 없는 것을 자신감을 가지고 흔들림 없이 계속 추구할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웨슬리는 엄밀한 의미에서 절대 무오한 완전을 주장하지 않았다. 그는 온전한 성화의 은혜를 경험한 이도 연약함과 무지와 실수가 있으며, 그에 대한 용서의 은혜가 필요함을 인정하였다. 그는 생의 말년에 이렇게 고백했다. “나는 내가 완전하지 않다는 것을 온 세상에 말해왔다.… 나는 내가 묘사한 성품에 아직 도달하지 못했다.” 웨슬리는 성화를 점진적인 과정으로 보는 칼빈의 견해에 전적으로 동의한다고까지 말했다. “칼빈이 그랬던 것과 꼭 같다. 이 점에서 나는 그와 털끝만큼도 다르지 않다.”
웨슬리는 칼빈주의 입장에서 볼 때 불완전한 상태에 불과한 성화의 수준을 완전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여 묘사함으로써 큰 혼란을 야기하였다. 이 외에도 그의 견해에는 여러 가지 문제점이 내재해 있다. 그중에 하나는 죄를 “아는 계명을 고의로 범한 것”으로 정의한 점이다. 그런 식으로 죄를 규정함으로써 웨슬리는 죄가 신적계명의 객관적이고 절대적인 요구보다 인간의 상대적이고 주관적인 인식 여부에 근거하여 결정되는 결과를 초래했다. 나아가, 칭의 후 ‘즉각적 성화’(instantaneous sanctification)가 일어난다는 그의 가르침은 죄책으로부터의 구원과 죄의 세력으로부터의 구원을 이단계적으로 분리함으로써 성결운동과 케직 사경회가 강조한 제2의 축복과 오순절운동이 주창한 중생 후 성령세례의 가르침에 초석을 제공한 셈이 되었다.
‘이미’와 ‘아직도’의 균형
\'완전에 대한 추구’는 웨슬리에게만 특유한 것이 아니다. 죄에서 자유하여 온전히 거룩하게 사는 것은 모든 진정한 그리스도인들이 바라는 바이다. 칼빈 또한 웨슬리 못지않게 거룩에 대한 열망과 온전한 삶에 대한 염원을 가진 사람이었다. 이렇게 같은 성화에 대한 관심과 갈망을 가졌음에도 그들의 성화론은 대조적인 특색을 띤다. 칼빈은 온전한 거룩함을 이루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갈망이며 목표이지만 그 소원은 오직 종말론적으로 성취될 뿐이며, 그 전까지의 신자의 삶은 죄의 세력에서 벗어날 수 없는 아주 불완전한 삶이라는 점을 강조했다. 반면에 웨슬리는 성령의 은혜는 신자를 죄의 결박에서 획기적으로 자유케 하는 ‘완전 성화’(entire sanctification)에 이르게 한다고 주장했다. 이런 강조점의 뚜렷한 차이는 그들이 성화론을 썼던 상황에서 직면했던 요구와 도전과 대적이 다른데서 기인했다고 본다. 칼빈은 로마 가톨릭과의 논쟁 속에서 성화의 불완전성을 크게 부각시킬 필요가 있었다면, 웨슬리는 불완전교리가 남용되는 상황 속에서 ‘온전한 그리스도인의 삶’에 대한 관심과 추구를 새롭게 불러 일으켜야 할 사명을 느꼈다.
웨슬리의 완전성화론이 안고 있는 근본 문제는 현재 실현된 것과 아직도 성취되지 않은 것 사이에 균형 잡힌 시각을 견지하지 못한 점이다. ‘이미’(already) 쪽으로 편중되므로 과장된 승리주의에 빠질 수 있는 위험을 극복하지 못했다. 대조적으로, 칼빈은 ‘아직도’라는 종말론적 포커스를 통해 성화를 고찰함으로써 이미 이루었다고 생각하는 완전주의적 망상과 영적 우월주의를 추방해 버린다. 동시에 성화의 참된 다이내믹인 겸손을 불러일으킨다. 우리 안에 계속 내재하는 죄성에 대한 강조는 우리의 죄와 불완전에 대해 좀 더 사실적인 안목을 갖게 하며 그로 인해 경성하는 삶의 자세를 취하게 한다. 칼빈에게 있어서 영적으로 성숙한다는 것은 자신의 부패성에 점점 더 예민해짐을 의미한다. 더 거룩해지고 은혜가 충만해질수록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성결의 높은 수준을 더욱 선명하게 보게 되며, 동시에 상대적으로 자신이 이룬 거룩함과 거리가 멀다는 것을 점점 더 깊이 인식하게 된다. 그러므로 은혜 안에서 성숙한다는 것은 자신의 불완전함을 더 깊이 절감하며 생생하게 볼 수 있는 겸손의 밑바닥으로 점점 내려가는 것이다. 만약 ‘겸손을 통해서 거룩해진다’(holiness through humility)는 역설적인 진리를 제대로 깨닫지 못하면, 우리는 쉽게 영적교만과 자기기만에 빠지게 된다.
그러나 ‘아직도’의 측면, 즉 신자의 죄성과 불완전에 역점을 둔 칼빈의 가르침은 간혹 그 문맥 속에서 이해되지 못하고 칼빈의 본래의도와는 달리 성화에 대해 염세적이고 부정적인 견해로 오도되곤 하였다. 그리하여 그의 불완전 교리가 온전히 주님의 뜻을 따라 살아야하는 신자의 중대한 의무를 교묘히 회피하는 좋은 구실로 남용되는 경우가 많았다. 불순종의 삶을 살면서 그것을 불완전하기 때문이라고 합리화하기 십상이다. 현대교회는 칼빈이 불완전을 강조해야만 했던 종교개혁의 상황과 대조적인 국면에 처해있다. 지금은 웨슬리가 가졌던 관심과 강조점이 필요한 때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웨슬리가 치우친 또 다른 극단적 오류를 답습해서는 안 될 것이다.
전통적인 교회가 성령안의 승리와 역동적인 성화에 대한 믿음을 잃고 있는 한, 이러한 도전을 통해 우리 신앙의 ‘불완전’과 ‘완전’, ‘이미’와 ‘아직도’사이의 균형을 회복하는 노력이 절실하게 요구되고 있다.
선지동산 49호 게재 / 성화의 복음(9) / 박영돈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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