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기고글] 획기적 은혜체험 - 박영돈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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획기적 은혜체험
선지동산 48호 게재 / 성화의 복음(8) / 박영돈 교수
은혜체험의 다양성
교인들 중 간혹 획기적인 계기를 통해 회개하고 새롭게 되는 은혜를 받는 이들이 있다. 이들은 그 체험이 자신에게 너무도 새롭고 획기적이기에 이것을 회심 후 제2의 축복처럼 생각하기도 한다. 나아가 다른 이들도 자신과 같이 이 은혜를 체험하기를 바란다. 이 선한 의도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자신의 특별한 경험을 다른 이들도 모두 따라야 할 패턴으로 정형화하는 위험에 빠지곤 한다. 그러나 회심 후 제2의 축복이라는 구도 속에 모든 신자들의 체험을 획일화하는 것은 은혜체험의 다양성을 무시하는 것이다. 어떤 이에게는 회심이 가장 획기적인 전환점인 반면, 다른 이는 회심 후 새로운 헌신과 회개를 통해 극적인 변화를 체험하기도 한다. 스탠리 존스(Stanley Jones)가 말했듯이 우리 영혼은 여러 차례에 걸친 위기를 통해 자란다. 성화의 과정에서 제2의 축복이라 불릴만한 획기적 은혜체험이 여러 번 거듭될 수도 있고 전혀 없을 수도 있다. 또한 다양한 형태의 극적인 은혜체험들과 점진적인 성숙이 공존하기도 한다.
따라서 은혜체험의 다양성에 대한 균형 잡힌 이해가 필요하다. 이차은혜에 대한 반대로 모든 획기적인 은혜체험의 가능성까지 부인해버리는 것은 바람직하지 못하다. 성화가 진행되는 점진적인 과정에는 위기적이고 극적인 성격을 띤 특별한 체험도 있다는 점을 부인할 수 없다. 윌리암 제임스는 그의 종교체험 분석에서 삶을 변화시킨 체험은 자주 갑자기 일어났다고 주장하였다. 위대한 설교자 스펄젼는 그의 설교에서 죄인들을 즉각적이면서도 획기적으로 변화시키는 복음의 은혜를 줄기차게 강조하였다. 그는 즉각적인 구원과 변화의 체험에서 우리를 새롭게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의 부요함이 가장 극명하게 드러난다고 본 것이다.
어떤 경우에는 극적인 은혜체험이 있은 후에야 점진적이고 정상적인 성숙이 가능하다. 로저스(A. Rogers)가 지적했듯이 “우리가 성령님께 우리의 모든 것을 굴복시킬 때 중대한 하나의 고비가 되는 경험이 있다. 그러나 그 고비가 되는 사건 뒤에는 진보가 따른다.” 많은 교인들이 성령 안에서 다이내믹한 성화가 진행될 수 있는 기본 스텝을 밟지 않는다. 성령이 그들을 주관하고 인도할 수 있도록 죄와 결별하고 성령께 굴복하지 않는다. 그들은 성령을 거스르고 살기에 점진적으로 성화되기보다는 오히려 점점 더 퇴화되어가며 강퍅해져 간다.
현대교회에는 과거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그랬듯이 영적인 불모지에서 끝없이 맴도는 이들이 많다. 그들에게 점진적인 성화의 권면은 통하지 않는다. 그들은 자라기보다는 계속 정체되어있다. 아니 거꾸로 자라고 있다는 말이 더 맞을 것이다. 그러기에 그들에게는 획기적인 각성과 돌이킴의 은혜가 필요하다. 이 특별한 은혜는 영적인 방황과 병적 미성숙의 상태를 종료시킨다. 동시에 그들이 정상적인 성숙의 과정으로 진입하도록 새로운 계기를 마련한다. 그러므로 이런 극적인 은혜는 점진적인 성숙을 필요 없게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진정한 성숙을 촉발시킨다.
획기적 은혜의 필요성
이것이 하나님께서 종종 타락한 자기 백성을 회복해 주시는 방법이다. 그래서 선지자들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회복하실 때 그들의 영적인 상태가 마치 삭막한 광야가 화초가 만발한 물댄 동산으로 급전환하는 것 같게 되리라고 예언했다(사 41:18-19; 렘 31:12). 영적 황무지에 은혜의 소낙비가 쏟아지면 그곳은 어느새 만개한 꽃들로 뒤덮인 동산으로 바뀐다. 은혜의 급습으로 오랜 불모의 시절은 막이 내리고 영적 풍요의 시대가 도래한다. 비록 이런 회복의 은혜는 징계와 오랜 기다림의 과정을 뒤따르는 것이지만 기다림에 지친 긴 포로생활이 종료되고 해방의 기쁨을 만끽할 때가 오듯이 우리의 상황이 급전환되는 은총의 순간이 온다. 이같이 “여호와께서 시온의 포로를 돌리실 때에 우리가 꿈꾸는 것” 같게 하신다(시 126:1). 이러한 비상한 은혜 없이 우리의 고질적인 불순종과 불신앙의 문제는 근본적으로 해결되지 않는다. 우리는 결코 영적 침체의 늪지에서 빠져나오지 못하며 죄와 실패의 악순환에서 헤어 나오지 못할 것이다. 오직 하나님의 주권적인 은혜만이 우리에게 새 출발을 가능케 한다. 부흥과 회복은 하나님의 주권적인 은혜로부터 시작한다. 그래서 부흥은 자주 인간적으로 가장 소망이 없고 기대할 수 없는 상황에 임한다. 성령충만도 이렇게 처절하게 실패한 이들에게 주어지는 은혜이다. 앞에서 살펴봤듯이, 성령충만은 즉각적인 동시에 점진적이다. 성령충만은 즉각적으로 임하는 주권적인 은혜이며, 이 획기적인 성령충만의 체험은 우리를 지속적으로 성령충만해지는 새로운 차원의 삶으로 들어가게 한다.
현대교회에 이런 부흥과 회복의 은혜가 절실히 필요하다. 제2의 축복이나 성령세례의 가르침이 이런 필요성에 대한 인식에서부터 비롯됐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다른 모든 은혜와 차별화되는 이차은혜가 회심 후에 꼭 있어야하며 이것이 성화의 진전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는 가르침은 성경적 지지기반을 확보하기 힘들다. 교회가 전반적으로 침체되어있는 현 상황에서 그들이 말하는 획기적인 변화의 체험이 존재할 수 있다. 그러나 그런 식의 은혜체험은 성경이 제시한 정상적인 패턴이 아니라 교회가 신앙의 정도를 떠나 방황한 결과로 일어난 특별한 현상이다. 죄의 세력으로부터 자유하고 성령으로 충만해지는 획기적인 성화의 체험은 그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꼭 나중에 가서야 가능한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예수와 연합하는 순간부터 누릴 수 있는 특권인 동시에 누려야 하는 의무이다.
비록 제2의 축복이나 성령세례의 가르침이 이와 같은 신학적인 문제를 안고 있지만, 이 교리는 성화와 오순절에 임한 성령충만 사이에 중요한 관련성이 있다는 것을 간접적으로 일깨워주는 공헌을 하였다. 곧 거룩한 삶, 능력있는 사역은 오직 성령충만할 때만 가능하다는 것을 강조함으로써 오순절 성령충만의 축복이 성화의 원동력을 제공한다는 점을 우리에게 상기시켜 주고 있다. 이러한 도전에 직면하여 정통신학은 성화를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사건뿐 아니라, 성령충만이 주어진 오순절사건과도 연결시킴으로써 성화는 그리스도와의 연합의 바탕위에서 성령의 능력으로 다이내믹하게 진행됨을 밝혀주어야 한다.
이 결정적인 성화와 성령충만이 성화의 두 기둥이다. 예수 안에서 결정적으로 성화된 새사람은 오직 성령 안에서만 존재하며 제 기능을 발휘한다. 성령으로 충만해야 죄의 지배에서 자유한 거룩한 사람으로 살 수 있는 것이다. 이처럼 결정적인 성화와 성령충만은 상호 긴밀하게 연결되어 성화의 근본 바탕을 이룬다. 우리는 이 바탕으로 다시 돌이켜야 한다. 현대교회에는 그리스도 안에서 결정적으로 죄에서 해방되고 거룩하게 된 자신의 새로운 실제를 알지 못한 채 성령을 거스르며 사는 교인들이 많다. 그들이 자신의 새로운 정체성에 대해 눈 뜨도록 성화의 복음을 바르게 전해야 한다. 믿음으로 그리스도와 연합할 때 죄에 대해 죽고 새사람으로 부활하는 획기적인 성화와 함께 성령충만의 특권이 자신들에게 주어졌다는 놀라운 사실을 깨닫게 해야 한다. 그리고 오랫동안 성령을 근심케 한 삶에서 돌이켜 거룩하게 된 자의 본분대로 살도록 인도해야 한다. 그럴 때에 우리 교회에 성령충만이 회복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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