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기독교보] 부족한 기독교가 아닌 지혜로운 기독교 - 하재성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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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족한 기독교”가 아닌 “지혜로운 기독교”!
하재성 교수 (고려신학대학원)
최근 기독교가 심리학에 물들어 부족하다는 말을 접하면서 바울이 고기 먹는 일로 로마 교회에 권면하였던 것을 생각한다. 바울은 의심하고 고기를 먹지 못하는 연약한 자들은 믿음이 없고 정죄되었다고 말한다(롬14:23). 그러나, 고기를 먹을 수 있는 “강한 자”들은 그들의 약점을 담당해야 한다고 권면한다 (15:1). 21세기에 이미 사회과학의 한 부분으로 자리잡은 심리학이나 혹은 다른 인문과학의 영역에 대해 근본적인 거부감을 가지는 것은 의심하고 고기를 먹지 못하는 연약한 자들의 모습과 같다.
심리학과 같은 사회과학이 마치 기독교 진리를 뒤집어 놓을 수 있는 “반기독교적 메시지”를 가졌다고 하는 것은, 오히려 우리 기독교의 진리가 그런 신지식에 의해 뒤집힐 수도 있다는 “의심 많은 불안”에서 비롯된 것이다. 지난 이 천 년 간, 그 모든 이단과 죄악의 사조 가운데서도 꿋꿋이 생명력을 지켜온 기독교가 이런 새로운 학문 영역에 의해 무너질 수 있는가? 심리학을 반대하는 사람들 속에 있는 기독교 진리의 영원함에 대한 이런 불신이 오히려 걱정스럽다. 심리학이나 다른 어떤 사회 과학도 기독교의 진리를 흔들 수 있는 능력이 없다. 심리학이란 그저 인본주의의 자생적인 학문 영역의 하나일 뿐이다.
정작 기독교가 부족하다고 말하는 [부족한 기독교]의 저자는 교회에 이 말을 하기 전에 먼저 심리학에 들어가서 싸웠어야 했다. 예를 들어 “심리학은 과학이 아니다”라고 말하려면 교회나 신학 영역에서 주장하기 전에 심리학에 종사하는 사람들과 한 판 전쟁을 하고 왔어야 한다는 말이다. 그러나 체계적으로 심리학을 연구하지 않았고, 혼자 독학하여, 극히 일부의 몇몇 특별한 심리학자들 (사실은 도태되어버린 오래된 몇몇 심리분석학자들)을 붙들고 씨름하면서, 이들이 비과학적인 인물들, 혹은 반기독교적인 인물들이라 주장하는 것은 목회 상담학의 본고장인 미국에서는 이미 반세기가 지난 옛날 이야기이다.
심리학이 비록 인간 내면에 대한 성찰에서 출발하기는 했지만, 현대 21세기의 심리학은 이 저자가 단순하고 편리하게 주장하는 “비과학적”인 단계를 넘었다. 그들의 방법과 연구는 수량화되어 있고, 검증과 반복의 과학적 방법을 반복하며 이론들을 현실에서 검증한다. 인간 이해를 위해 매우 예리하게 분석하고, 그 결과를 현실에서 실용화 하고 있다.
더구나 심리학이 “객관적 과학”이 아니기에 일반은총에 포함될 수 없다고 말하는 것은 과학과 일반 은총 모두에 무지한 언급이다. “과학이 객관적이라”는 말은 실은 과학을 이상화시킨 근대 경험주의 철학에서 비롯된 이념상의 허상일 뿐이다. 현대 과학 철학자인 MIT의 Thomas Kuhn과 같은 사람은 과학의 역사를 통해 볼 때 “순수 객관적”이라는 과학이 얼마나 “주관적”인 영역이 될 수 있는지 패러다임 paradigm이라는 말로 주장하였다.
더구나 의학을 비롯한 현대 과학에는 우리가 받을 수 없는 진화론이 엄연히 전제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위의 저자는 이런 과학을 무조건 기독교적 진리의 영역으로 인정하고 있다. 그렇다면 기독교의 진리를 진화론적 과학과 무비판적으로 혼합하는 것이 누구인가? 그리고 심리학이 이런 “과학과 다르기 때문에 일반은총이 아니라”고 하는 말은 이 저자가 일반 은총에 대한 신학적 이해력도 부족함을 알 수 있다 (물론 평신도인 위 저자의 순수한 열정과 노력에 대해서는 어떤 말로도 칭찬이 모자랄 것이다).
개혁주의는 복음과 신학, 그리고 삶의 순수를 지향한다. 그러나, 개혁주의의 순수는 결코 지상의 언어나 인간의 고통을 벗어난 순수가 아니다. 인간 경험을 벗어난 순수는 헬라 철학의 플라톤적 이원론과 이상주의에 불과하다. 바울이 서신서에 헬라적 지식을 사용한 것, 어거스틴이 신플라톤적 철학으로 신론을 설명한 것, 그리고 칼빈이 에라스무스의 인문주의나 법학을 학문적 배경으로 가지고서 신학의 체계를 세운 것을 보면, 개혁주의적 순수는 매우 유기적이고 통합적이면서도 신학적 주체성과 비판력을 잃지 않은 것임을 알 수 있다.
목회 상담학을 가르치는 교수로서 필자는 심리학을 교육의 도구로 사용하지만, 궁극적으로 심리학 편이 아니라 신학과 목회자 편이다. 하지만 심리학은 현대 사회과학의 한 분야로서 무시할 수 없는 중요성과 의미를 가지고 있고, 인간 경험과 내면을 수량화, 혹은 적어도 개연화 시키려는 노력을 해 가고 있다. 그리고 심리학은 스스로 자신의 실용성과 가치를 계속 입증해 가야 한다. 다만, 이미 21세기의 문화와 언어가 되어버린 이 사회과학적 분야를 근본주의적 “순수성”에 호소하여 신학과 교회에서 배척하는 것은 목회적, 신학적으로 무지한 일이다.
유기적이고 통합적 지식 없이 고립된 “순수함”만을 지향하는 것은 기독교적인 모습이 아니라 오히려 헬라 철학적이다. 개인적으로는 집착증 obsession에 붙들린 연약한 모습이다. 균형 잡힌 목회자들이 자칫 이런 센세이셔널리즘의 허상에 이끌려 연구와 사역에 그릇된 선입견을 가질까 염려된다. 물론 종래 한국의 기독교 상담학자들이 무비판적으로 심리학적 지식을 기독교 진리와 대등하게 놓으려 했던 것이 있다면 그 미숙함을 반성해야 한다.
하지만, 우울증 혹은 자살의 충동을 느끼면서 갈등하는 성도들의 마음이 왜 그런지 가르쳐 주는 지식을 눈감고 배척하는 것은 무책임한 일이다. 오히려 더 적극적으로 배워야 하지 않는가? 혹 충돌되는 가치가 있다면 고민하고 연구하며 비판적으로 수용할 수 있지 않은가? 우리의 신학이 그 정도의 안정성과 수용성도 없는 약체인가? 왜 로마 교회의 연약한 사람들처럼 고기 먹는 사람들을 정죄만 하고 있을 것인가? 뱀처럼 지혜롭고 비둘기처럼 순결한 사역이 21세기에 필요하지 않은가?
[기독교보 2008년 3월 29일자 게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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