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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기고글]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내 육체에 채우노라 - 길성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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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댓글 0건 조회 11,718회 작성일 08-07-02 13: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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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내 육체에 채우노라
골로새서 1장 24절 해석

선지동산 47호 게재 / 성경본문 바로읽기(16) / 길성남 교수




골로새서에서 가장 난해한 본문 가운데 하나는 아마도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내 육체에 채우노라\"일 것입니다. 이것은 골로새서 1장 24절에 나오는 사도 바울의 고백의 일부입니다. 사도의 고백을 모두 인용하면 이렇습니다. \"내가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 엄숙하면서도 신비한 느낌을 갖게 합니다. 동시에 사도의 이 고백은 해결하기 어려운 문제를 제기합니다. 예컨대 이런 문제들입니다.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이란 무엇인가? 인류의 구속을 위한 그리스도의 고난에 부족한 것이 있다는 말인가?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자기 육체에 채운다는 것은 또 무슨 말인가?
개역 한글판에서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이라고 번역한 표현을 있는 그대로 읽으면 그리스도 자신이 당한 고난이 충분하지 않으며 아직 채워야 할 부분이 남아 있다는 인상을 줍니다. 하지만 사도 바울은 어디에서도 그리스도께서 당하신 고난에 부족함이 있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도리어 그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피로 화평을 이루셨고(골 1:20), 그의 육체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이방인 성도들을 자기와 화목하게 하셨다고 말합니다(골 1:22). 또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받았다고 선언합니다(롬 3:24). 인류의 구속을 위한 그리스도의 고난에 부족함이 전혀 없다는 말입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고난\'이라는 표현을 그리스도 자신이 받은 고난을 뜻하는 것으로 보아서는 안 됩니다. 더구나 이 표현에서 \'고난\'이라고 번역한 헬라어 단어는 \'뜰립시스\'(thlipsis)인데 신약성경 어디에서도 예수 그리스도 자신이 받은 고난을 가리키지 않습니다. 그러면 \'그리스도의 고난\'이라는 표현은 무엇을 가리킬까요?  
1975년 영국의 성경학자 리처드 보쿰(Richard J. Bauckham)이 처음으로 제안한 이래, 많은 골로새서 주석가들은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이라는 표현을 유대 묵시문헌의 증거에 비추어서 해석합니다. 유대 묵시문헌들에는 메시아 시대가 도래하기 전에 대재앙과 재난이 닥칠 것이라는 진술이 나옵니다. 이 종말의 재난을 \'메시아의 화\'(the woes of the Messiah)라고 하는데, 그 분량이 미리 정해져 있다고 합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미리 정해진 고난의 양을 다 채울 때 메시아의 시대가 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받을 \'메시아의 화\'는, 이를테면, 메시아 시대를 해산하기 위한 고통(birth-pangs)과도 같은 것입니다. 많은 주석가들은 유대 묵시문헌의 \'메시아의 화\'와 골로새서에 나오는 \'그리스도의 고난\'을 같은 개념으로 해석합니다. 이 견해에 따르면, \'그리스도의 고난\'이란 그리스도의 재림이 있기 전에 하나님의 백성들이 겪어야 하는, 그리고 하나님께서 그 분량을 미리 정해두신, 고난입니다.
그러나 이 견해는 문제점을 안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골로새서를 기록할 당시에 유대교나 초기 기독교에 \'메시아의 화\'라는 개념이 분명히 정립되어 있었다고 보기 어렵습니다. 유대 묵시문헌들에서조차 ‘메시아적 화’의 성격, 주제, 시기에 대한 묘사가 분명하지 않고 일치하지도 않습니다. 사도 바울이 분명하게 정립되어 있지도 않은 개념을 골로새의 이방인 성도들에게 소개했을 가능성은 그리 높지 않습니다. 또한 골로새서 본문에서 사도는 자신이 종말이나 그리스도의 재림을 대비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교회를 위해서 고난을 받는다고 말합니다.
그러면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이라는 표현을 어떻게 이해하는 것이 좋을까요? 우선, 이것을 그리스도 자신이 당한 고난이나 \'메시아의 화\'라는 유대 묵시적인 개념이 아니라, 신자들이 그리스도와 그의 복음을 위해서 당하는 고난을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이 표현에서 헬라어 명사 \'뜰립시스\'(고난, 또는 환난)는 사도들이나 신자들이 당하는 고난이나 재난을 가리킵니다. 사도 바울은 루스드라와 이고니온과 안디옥의 제자들에게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행 14:22; 참조. 살전 3:3, 7; 롬 8:17). 여기서 \'환난\'이라고 번역한 단어가 바로 \'뜰립시스\'의 복수형입니다.
그런데 신자들이 그리스도를 위해서 겪어야 할 고난/환난은 또한 그리스도 자신의 고난이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는 교회의 머리이시고,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는 교회의 머리로서 신자들이 겪는 환난을 자신의 고난으로 간주하십니다. 우리는 이것을 다메섹 도상에서 그리스도께서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행 9:4)라고 하신 말씀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는 사울이 신자들을 핍박한 것을 자신을 핍박한 것으로 간주하셨습니다. 자기 백성이 환난을 당할 때 그리스도 자신도 고통을 느끼시는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신자들이 그리스도 때문에, 그리스도를 위하여, 당하는 고난을 ‘그리스도의 고난’이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도 그리스도의 몸에 속한 자로서 자신이 겪는 고난을 ‘그리스도의 고난’으로 간주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다음으로, 개역 한글판에서 ‘남은’(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이라고 번역한 헬라어 단어는 명사 ‘휘스테레마’의 복수형인데 ‘부족한 것들\', \'결핍된 것들\'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이라는 어구는 문자적으로는 \'그리스도의 고난들의 부족한 것들\'이라고 번역해야 합니다. \'부족한 것들\'이라는 표현은 신자들이 그리스도를 위해서 겪어야 할 고난이 아직 부족함을 암시합니다. 또한 이것은 고난의 양이나 한계가 정해져 있음을 전제하는 것 같습니다. 정해진 양이나 한계가 있어야 그것을 기준으로 해서 부족하다고 말할 수 있고, 부족한 것을 채운다고 말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교회를 위하여 자기 육체로 고난을 받음으로써 정해진 고난의 부족한 분량을 채우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 해석은 성경의 지지를 받을 수 있을까요? 하나님의 백성이 받을 고난의 양이 정해져 있다는 것은 매우 낯선 개념입니다. 실제로 성경에서 이런 개념을 명확하게 말하는 본문을 찾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아주 없다고 할 수 없습니다. 종말 강화에서 예수님은 마지막 때에 대환난이 있을 것인데, 택하신 자들을 위하여 하나님께서 그 환난의 날들을 감하실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마 24:22; 막 13:20). 이 본문은 대환난의 분량에 한계가 있음을 암시합니다. 요한계시록 6장 9-11절에서도 고난의 분량이 정해져 있다는 개념을 찾을 수 있습니다. 이 본문에는 \'하나님의 말씀과 저희의 가진 증거를 인하여 죽임을 당한 영혼들\'이 큰 소리로 하나님께 복수를 요청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들은 하나님께 부르짖습니다. \"대주재여 땅에 거하는 자들을 심판하여 우리 피를 신원하여 주지 아니하시기를 어느 때까지 하시려나이까?\" 이 부르짖음에 하나님께서 응답하십니다. \"아직 잠시 동안 쉬되 저희 동무 종들과 형제들도 자기처럼 죽임을 받아 그 수가 차기까지 하라\"(11절). 순교자의 수가 차기까지 기다리라는 말씀입니다. 이것은 순교 당할 사람의 수가 미리 정해져 있음을 전제합니다. 순교자의 수가 다 찰 때 하나님께서 마지막 심판을 시행하실 것입니다. 유대 묵시문헌에도 마지막 심판이 시작되기 전까지 죽임 당할 의인의 수를 하나님께서 주권적으로 정해두셨다는 개념이 나옵니다(1 Enoch  47.1-4; 2 Esdr. [4 Ezra] 4:35-37; 참조. 2 Bar 23.4-5). 엄밀하게 말하자면, 순교자의 수를 정해놓았다는 것이 고난의 분량을 정해놓았다는 것과 동일한 개념일 수 없습니다. 하지만 두 개념은 밀접한 관련이 있습니다. 고난 중에 순교가 일어나기 때문입니다.
이상의 사실에 근거하여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이 그리스도를 위해서 겪어야 할 고난의 분량이 미리 정해져 있다는 개념을 조심스럽게 수용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이 악인들에게 고난당하는 것을 허용하시지만 그 고난이 극한 지경에 이르거나 무한히 계속되게 하지는 않으십니다. 고난이 (미리 정해진) 양이나 수준에 이를 때 하나님께서 개입하실 것입니다(의인들의 고난은 악인들에 의해 일어나는 것이므로 고난의 양이 차는 것은 또한 죄악의 양이 차는 것을 뜻합니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으로 환난 받게 하는 악인들에게는 환난으로 갚으시고 환난 받는 자기 백성에게는 안식으로 갚으실 것입니다(살후 1:6-10).
골로새서 1장 24절을 읽으면서 우리는 자기 백성이 당할 고난의 분량을 정해놓으신 하나님의 자비하심을 기억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고난의 분량을 정해놓으셨을 뿐만 아니라 자기 백성이 고난을 당할 때 함께 하시면서 고난을 이길 힘도 주십니다. 고난을 통해 인내를 이루게 하시고 많은 영적 유익을 얻게 하십니다. 또한 우리는 이 본문에서 고난에 대한 사도 바울의 적극적인 태도에 주목해야 합니다. 그는 이방인 성도들을 위하여 괴로움을 받으면서도 슬퍼하거나 불평하지 않았습니다. 도리어 기뻐합니다! 세상에 고난을 기뻐하는 사람이 있을 수 있을까요? 누구나 고난을 싫어합니다. 할 수 있으면 피하려고 합니다. 사역자들도 사람이기에 고난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이방인 성도들을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한다고 말합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자신이 받는 고난으로 인해 이방인 성도들이 영적인 유익을 얻을 것이기에 기뻐합니다. 또한 자기가 고난을 받는 만큼 미리 정해진 고난의 양이 채워지고, 다른 성도들이 받을 고난의 양이 줄어들기에 기뻐합니다. 그는 성도들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기까지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환난이 인내를 이루는 것이므로 성도들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한다고 말하였습니다(롬 5:3). 그러나 그는 연약한 이방인 성도들이 환난 중에 믿음을 잃지 않을까 염려하기도 했습니다(살전 3:1-8; 고후 11:28-29). 그래서 골로새 교회의 연약한 이방인 성도들을 위하여 고난을 당하면서 그들이 받을 고난의 양이 줄어드는 것에 기뻐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어떤가요?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고난을 받기보다 영광을 받기를 더 기대하지 않는지요? 그러나 진정한 신자는 고난을 피할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핍박을 받게 되어 있습니다(딤후 3:12). 고난을 받는 것이야말로 신자 됨의 중요한 특성입니다. 고난은 큰 고통을 수반하는 것이지만 동시에 기뻐해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를 인하여 너희를 욕하고 핍박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스려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마 5:11-12). 심지어 사도들은 고난을 받을 때 \"그 이름을 위하여 능욕받는 일에 합당한 자로 여기심을\" 기뻐하였습니다(행 5:41). 사역자로 부름 받은 자들은 고난 받기를 두려워해서는 안 됩니다(딤후 1:8; 참조. 딤후 2:3). 그리스도를 위하여, 그리고 연약한 성도들을 위하여 기꺼이 고난을 받아야 합니다. 고난을 받는 자, 복이 있습니다. 하늘에서 상이 큼으로 기뻐하고 즐거워해야 합니다.
  (다음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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