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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논문] 고신교회는 언제 시작되었는가? - 이성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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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성구
댓글 0건 조회 9,876회 작성일 08-07-02 00:41

본문


고신교회는 언제 시작되었는가?

- 1977년 \'고신 30주년 기념 대성회\'와 고신 창립 기산 문제 -

이성구 교수
* 이 논문은 고신역사연구소가 2008. 6월 발행한 \'한국교회와 역사\' 창간호에 실린 글이다 *



제기되는 문제

고신교회 설립 50주년 행사를 치른 지도 수년이 지난 지금에 와서 ‘고신 교회는 언제 시작되었는가?’와 같은 질문을 던진다는 것은 우스꽝스러운 일이다. 어쩌면 공연히 문제를 일으키려 한다는 오해를 받을 소지도 있다. 그러나 필자는 이런 어쭙잖은 질문을 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을 목도하고 있다, 엄연한 역사적 모순이 발견되었으므로 불편하더라도 맞닥뜨려 볼 수밖에 없다.

        2002년 9월 24일 오후 4시부터 9시까지, 제52회 대한예수교 장로회 고신 총회가 개회되던 신학대학원 강당에서는 ‘교단 50주년 기념대회 준비 위원회’(위원장 곽삼찬목사)가 주관하는 교단 설립 50주년 기념대회가 열렸다. 이 날은 1952년 9월 11일 진주 성남교회당에서 열린 제57회 경남법통노회에서 대한예수교장로회 총로회를 조직키로 가결한 때를 기점으로 삼았음을 쉽게 짐작할 수 있다.

        그런데 2002년 당시 전혀 문제없이 진행된 고신교회창립 기념행사는 지내놓고 보니 한 가지 모순점을 드러내었다. 창립 50주년 기념대회는 2002년도에 열렸지만, 그 보다 20년 전에 열렸어야 하는 ‘30주년 기념 대 성회’는 놀랍게도 25년 전인 1977에 개최되었다. 현재 남아있는 자료들에 따르면 30주년 기념 대성회는 ‘순교정신을 계승하자’는 주제로 1977년 8월 15일부터 19일까지 당시 고려신학대학이 소재하고 있던 부산 송도와 구덕실내체육관에서 열렸다1). 2002년 9월, 50주년 기념행사를 가질 당시의 계산방법에 따르면 1982년 9월에 30주년 기념식을 했어야 한다.

        역사를 가진 공교회가 공적으로 개최한 30주년과 50주년 기념행사가 20년이 아니라 25년의 간격을 두고 열린 이 기막힌 현상은 지금까지 단 한 번도 문제시 되지 않은 채 엄연한 역사적 사실로 기록되어 있다. 도대체 한국교회 역사의 문제점을 안고 세워진 고신교회에서 어떻게 이런 일이 발생할 수 있었을까? 역사의 흐름에서 30년이라는 시간은 비교적 짧은 기간이므로 30주년 기념행사를 할 당시에는 교단 창립 현장에 있었던 분들도 상당수 살아있었을 뿐 아니라 강사로 참여하기도 하였다. 1952년 9월에 총노회가 열린 사실은 고신인리나면 누구나 아는 상식인데, 어떻게 총노회 조직 25년 만에 30주년 기념행사를 할 수 있었던 것일까? 선뜻 이해하기 어려운 이 역사적 모순을 정확하게 파악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30주년 기념대회가 열린 상황을 소상히 추적해 볼 수밖에 없다.

회개와 자숙이 요청된 한국교회

그렇다면 교회로서의 고신은 언제 시작된 것인가? 해방이전까지 한국에는 단 하나의 장로교회가 존재하였다. 그런데 해방과 함께 장로교회는 ‘신사참배’ 문제로 논란에 휩싸이게 되었다. 교회의 완전한 복구를 주장하는 최덕지 전도사 중심의 재건파는 신사참배한 자들이 모인 예배당조차 부정한 것으로 치부하고 불을 지를 만큼 기존 교회에 적대적이었다. 모든 교회를 재건의 대상으로 삼았다. 그러나 신사참배를 반대하다 옥고를 치른 대부분의 출옥성도들은 그렇게까지 생각하지 않았다. 그들은 일제하 신사참배정책에 굴복한 기존 교회의 지도자들이 회개하고 자숙할 것을 주장하였다. 그런데, 이 회개와 자숙요청에 관하여 오해가 있어왔다. 지금까지 일반적으로 알려진 바에 따르면, 출옥성도들이 신사참배에 가담한 교회 지도자들에게 회개와 자숙에 대하여 과도하게 요구하는 바람에 결국 교회의 분열을 가져왔다는 것.

        그러나 이러한 회개와 자숙 안은, 흔히 알려진 것처럼, 출옥성도들이 먼저 제안한 것이 아니었다. 1988년에 발행된 ‘한국장로교회사(고신)’는 이 사실을 분명하게 밝히고 있다.2) 북한에서 시작된 교회재건 운동이 일어나던 때인 1945년 9월 2일 부산진교회(최재화 목사 시무)에서는 ‘신앙부흥운동 준비 위원회’를 조직하였다. 이것은 출옥한 주남선, 한상동 목사가 아직 북한에 있을 때에 일어난 일로 최재화 권남선 김길창 노진현 심문태 목사 등 20여명이 주축이 되어 시작되었다. 그들은 과거의 범죄를 회개 청산하고 정통신앙에 기초한 교회 건설에 매진할 것을 결의하였다. 물론 이들의 행동을 철저하게 자신들의 기득권을 유지하려는 처세술로 보는 경향이 농후하고 실제로 그랬을 가능성이 많아 보이는 것은 사실이다. 최재화, 심문태 두 목사의 이름으로 발표된 다음의 선언문에는 자신들이 행한 일에 대한 회개와 반성의 빛이 전혀 드러나지 않는다. 그들은 2차 대전 종전으로 인한 해방과 그로 인하여 누리게 된 제도적인 자유가 하나님의 은혜로 주어진 것이라는 인식을 전혀 보이지 않는다. ‘자연해소의 운명’으로 일제의 모든 압박이 끝나게 되었다는 것이 그들의 입장이었다.

성명서

과거 장구한 시일에 가혹한 위력 하에 교회는 그 정조를 잃고 복음은 악마의 유린을 당하고 신도는 가련한 곤경에 처해 있었다. 이를 저항 구호하기 위하여 일선에선 우리 하나님의 성군들은 순교의 제물이 되기도 하고, 혹은 옥중에서 최후까지 결사적 총의를 다하였던 것이다. 어시호 세계대전 (於是乎 世界大戰)은 종국을 고하고 하나님의 성지가 우주에 나타나며, 암흑의 세력은 물러가고 정의의 은광이 오인(吾人)을 맞이하자 어찌 이 기쁨을 다 말할 수 있으랴, 오늘날까지 노예의 속박 하에 끌려오던 모든 제도 일절은 자연 해소의 운명에 이르고 말았다.

     우리는 과거의 모든 불순한 요소를 청산 배제하고 순복음적 입장에서 교회의 근본 사명을 봉쇄하려는 의도에서3) 좌기에 의하여 조선 예수고 장로회 경남노회를 재건하려는 것이다. 백만 신도는 이에 순응하심을 바란다.

     (1) 우리는 종교 개혁의 정통신앙을 사수한다.
     (2) 우리는 조선 예수교 장로회 헌법을 전적으로 채용한다.

해방되기 불과 보름전인 1945년 8월 1일 조선의 모든 교회를 병합하여 ‘일본 기독교 조선 교단’으로 만들 때 일본인들과 함께 하였던 그들에게 교회재건의 의미는 “대한예수교 장로회 헌법을 전적으로 채용하는 것”에 불과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위 성명서 발표에 이어 1945년 9월 18일 경남노회를 재건하는 절차를 밟으면서 일제하에서 범한 죄과에 대한 구체적인 자숙 안을 상정함으로써 나름대로의 일관성을 유지했다. 해방 직후, 출옥성도들이 전혀 관여하지 않은 상황에서 그들이 만든 자숙의 방법은 두 가지였다.

     첫째, 목사, 전도사, 장로는 일제히 자숙에 옮겨 일단 교회를 사직할 것.
     둘째, 자숙기간이 종료되면 교회는 교직자에 대한 시무투표를 시행하여 그 진퇴를 결정할 것 등이었다.

이러한 자숙 안은 알고 보면 비슷한 시기에 북한에서 출옥성도들에 의해 제안된 자숙안 보다 훨씬 강경한 것이었다.4) 목사 장로 전도사 전원이 휴직 아닌 사직하도록 결의한 것은 교회가 취할 수 있는 최강의 조치라고 할 수 있다. 물론 이러한 조치가 쉽게 시행에 옮겨졌을 가능성은 많지 않아 보인다. 특히 경남노회는 대다수 사람들이 신사참배에 참가하였기 때문에 자숙안대로 한꺼번에 모든 사람이 사직하는 일은 어려운 일이었다. 오히려 해당자들은 자신을 변명하기에 바쁠 수밖에 없었다. 그 때문에 재건노회는 분란에 휩싸이게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결국 그해 12월 3일에 열린 제47회 경남노회에서는 재건노회 임원들의 총사직을 요구하기에 이르렀고, 이에 주남선 목사는 법보다 은혜로 노회를 재건해야 한다는 견해를 피력하며 손양원 목사를 강사로 하여 집회를 열고, 노회를 개회하기에 이르렀다. 교권회복을 노리는 김길창을 비롯한 신사참배 가담자들은 물론 노회가 주관하는 집회에 참석하지 않았다.

        1945년 12월 3일부터 열린 경남노회에서 노회장에 추대된 주남선 목사는 즉각 수락하기를 거부하면서 회개운동의 실행조건을 제시, 통과시켰다. 그러나 여전히 다수는 자숙하는 일에 불응하며 점점 그 세력을 확장하는 데 힘을 쏟았다. 1946년 7월 9일에 경남노회 47회 임시노회가 진해읍교회에서 열렸고 이 때 한상동 목사가 남하하여 처음으로 노회에 참석하였으며, 주남선목사가 노회장으로 정식 추대되는 등 노회의 재건이 진전을 보이는 것 같았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일본 교단시대 교권주의자들은 출옥성도들을 독선주의자로 비난하며 교권장악에 나서기 시작하였고 마침내 1946년 12월 3일 진주에서 열린 제48회 경남노회에서는 사전 선거운동에 열을 올린 것으로 알려진 김길창 목사가 결국 노회장에 당선되는 사태가 벌어졌다. 김길창은 1938년 9월 장로교회가 신사참배하기로 가결했을 당시 부총회장으로 신사참배단을 인솔하였을 뿐 아니라, 일본이 한국교회 탄압의 방법으로 한국교회 모든 교파를 ‘일본기독교 조선교단’으로 통폐합하는 강경수단을 동원했을 때, 경남교구의 교구장을 맡았던 유명한 정치목사였다. 그가 노회장이 되었다는 말은 해방된 지 1년 반도 채 지나기 전에 경남노회는 일제시대의 참혹한 과거사를 기억에서 지워버리기로 한 셈이었다. 이때부터 경남노회는 그동안 조성되었던 신사참배 행위에 대한 참회와 자숙의 분위기가 사라지고, 신사참배가 과연 죄악인지에 대한 태도 표명 요구가 나올 지경이 되었다. 그러자 노회는 보란 듯이 신사참배에 대해서는 더 이상 거론하지 못하도록 하는 결정을 하기에 이르렀다5). 노회 지도부는 한걸음 더 나아가 고려신학교 문제까지 재론하여 인가를 취소하고 신학생 추천도 못하도록 결정해 버렸다.

        마침내 한상동 목사의 인내가 한계를 드러내었다. 48회 노회가 계속되는 상황에서 “불손한 태도를 고침이 없이 그대로 나아가는 경남노회가 바로 설 때까지 탈퇴한다”고 선언하고 퇴장하였다. ‘바로 설 때까지’라고 하였기 때문에 경고의 의미가 더 많았다는 훗날의 해석은 그리 틀리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6). 1949년 4월에 발행된 파숫군 2호에 실린 한상동목사의 글은 그가 48회 노회 이후 구포에서 열린 임시노회, 50회 정기노회 상황을 직접 참여한 증인의 입장에서 기록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문자 그대로 경남노회를 끝까지 거부할 생각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7). 그러나 한상동목사의 탈퇴선언은 커다란 반향을 일으켰고, 마침내 그 사건이 있은 지 4개월 후인 1947넌 3월 10일 구포교회에서 사태수습을 위한 임시노회가 소집되었다.

        경남노회 산하 교회들의 반발과 평신도들의 조직적 저항에 부딪힌 48회 경남노회 임원진은 김길창 노회장을 비롯한 전임원이 총사직하는 사태를 빚었고, 새삼스럽게 신사참배가 죄라는 사실을 인정하는 촌극을 벌였다. 그와 함께 노회는 한상동 목사에게 탈퇴선언을 취소하는 성명을 낼 것을 요구하였다. 그러나 한상동 목사는 임원들의 사직이나 신사참배에 대한 태도의 변화에 진정성이 없다는 이유를 들어 저들의 요구를 거절하였다.

        해방직후부터 회개와 자숙의 요청에 직면한 한국교회는 1945년 9월 18일 신사참배파 스스로 자숙안을 제출한 이후 계속되는 갈등의 시간을 보내다가, 마침내 1947년 12월 9일 부산 광복교회에서 열린 제49회 경남노회는 47회 노회(1945.12, 문창교회)에서 결정한 자숙안에 불복종한 목사들에게 사과서를 받도록 결의하였다. 이와 함께 동년 10월 14일 고려신학교장에 취임한 박형룡 박사는 고려신학교를 총회의 신학교로 승인받는 노력을 할 것임을 밝혔고, 한상동 목사도 탈퇴선언을 취소하였다. 바야흐로 경남노회가 회개와 자숙에 나서고, 출옥성도들이 중심이 된 고려신학교를 인정하면서 안정을 찾는 모습을 보여주는 듯하였다.

자숙에서 분리로 나아간 한국교회

        그러나 이러한 상황도 오래가지 않았다. 박형룡 박사가 총회인정 문제와 서울이전 문제로 고려신학교 설립자와 갈등을 일으켜 1948년 4월 고려신학교를 떠나게 되자 가라앉아 있던 갈등이 다시 표면화되었고, 결국 그해 9월 부산항서교회에서 열린 제49회 경남노회 임시노회는 또다시 고려신학교 인정취소를 결정함으로써 사태를 폭발직전으로 끌고 갔다. 이 때 고려신학교에 대한 재조사안도 함께 결정되어 폭발은 일어나지 않았다. 그러다 동년 12월에 열린 50회 경남노회(마산문창교회 별관)에서 신학부장 심문태 목사가 신학교에 유리한 보고를 하였으나, 어찌된 셈인지 노회는 고려신학교 취소결의를 재확인하고 말았다. 그 이후 경남노회는 고려신학교를 지지하는 자들과 적극 반대파, 중간파 등 3파로 분열된 모습을 보였다.8) 결국 그 동안 경남노회의 문제로 남아있던 고려신학교 문제는 마침내총회적인 이슈로 비화되었고, 1948년 4월 20일부터 새문안교회에서 열린 제34회 총회는 드디어 “고려신학교는 우리 총회와는 아무 관계가 없으니 노회가 추천서를 써 줄 필요가 없다”는 총회 정치부장의 선언을 듣기에 이르렀다. 이듬해인 49년 4월에 열린 제35회 총회는 한 걸음 더 나아가 ‘노회들이 고려신학교와 관계하는 것은 총회결의에 위배되는 것’으로 확인했고, 전권위원회까지 파송하여 문제를 해결하도록 결정하였다. 총회 전권위원회는 각 교회로 하여금 고려신학교 관계자들과 강단교류를 못하도록 하였고, 노회를 아예 3분화하기로 결정하였다. 고려신학교를 중심한 경남노회의 세력이 약화될 수밖에 없도록 만들었고, 한걸음 더 나아가 아예 교제를 끊도록 조치해 버린 것이다.9)

        이러한 일련의 과정은 고려신학교 지지자들의 설자리를 없애는 방향으로 흘러갔고, 1950년 4월 21일 대구 제일교회당에서 시작된 제36회 총회는 첫날부터 회원권 문제로 혼란에 휩싸였고, 4월 25일 진행된 경남노회 전권위원회 보고를 기각하기로 하고 7인별 위원회를 내기로 결정한 후 정회하였다. 경남노회 사건 외에도 조선신학교 사건도 겹쳐 경찰이 동원되는 등 최악의 모습을 보이다 급기야 5개월 후인 9월 5일까지 정회하는 사태가 발생한 것이다. 그러나 이후 발생한 6.25전쟁으로 9월에 속회를 하지 못한 36회 총회는 이듬해인 1951년 5월 25일 부산중앙교회에서 총회를 속회하였다. 이 때 고신 측 인사는 안용준 목사 등 두 명만 참석하게 하였고, 경남노회 12명의 총대는 입장을 거절하였다. 이런 가운데 경남노회 특별위원들의 보고가 있었는데, 그 결과 이미 역사적으로 존재하고 있던 경남노회(후일 법통노회라 부름)를 제쳐놓고 별 위원회가 조직한 별 노회의 총대를 정식총대로 받기로 결정하고 말았다. 고려신학교 지지자들은 드디어 교회 밖으로 밀려나게 된 것이다.

        그러나 고려신학교 지지자들 중심의 경남법통노회는 1952년 4월 29일 대구 서문교회당에서 열린 제37회 장로교총회에 총대를 파송하고 총회와의 관계 정상화에 힘을 기울였다. 그러나 총회는 드디어 경남노회가 파송한 총대 12명을 제명하고, “고려신학교 그 관계단체와 총회는 하등의 관계가 없다”는 말로 고려신학교 관계자들과 총회의 관계를 단절하였다.

        고신은 1952년의 37회 총회에서 공식적으로 단절되었지만 그 이전인 36회 총회 이후 사실상 고신은 분리의 길로 내몰렸다. 1951년 5월 말 열린 36회 총회 속회가 끝난 지 3개월이 지난 9월 8일, 총회는 한상동 목사에게 초량교회의 명도(明渡)를 요구하였고, 10월 14일 주일에는 500여명 교인 중 90%가 넘는 사람들이 초량교회를 떠나 삼일교회를 개척하게 되었다. 37회 총회가 열리기 전에 이미 교회의 분리는 시작되었던 것이다. 1951년 8월 19일 주일에는 출옥성도 편에 선 대구 서문교회의 김주오 장로, 박복달 집사 등 6명이 교회로부터 제명을 당하는 일이 발생하였고, 8월 26일에는 서문로교회를 세우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이런 과정을 거치면서 1952년 총 노회가 조직되기도 전, 300여교회가 경남법통노회를 지지하기에 이르렀다. 고신교회의 설립 조건이 무르익어 갔던 것이다.

고신교회의 설립

총회와의 관계 회복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거듭 확인한 경남법통노회는 1952년 9월 11일 진주 성남교회당에서 57회 경남노회를 열고 총노회 조직을 결의하며 그 취지를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다.

“현 대한 예수교 장로회 총회는 본 장로교 정신을 떠나서 이교파(異敎派)적으로 흐르므로 이를 바로 잡아 참된 예수교 장로회 총회로 계승하기 위하여 총로회를 조직함.”10)

이 총로회는 무엇보다 그동안 문제가 되었던 신사참배 행위에 대한 자숙 문제를 결론지었다. 즉 목사, 장로, 남녀전도사들은 3주간동안(1952.9.22-10.12) ‘공인 죄’(신사참배, 신도연맹가입, 미소기 바라이)와 ‘자인 죄’를 공예배 중에 회개하도록 결의하였다. 그런데 이와 같은 3주간 자숙 안은 회개와 자숙에 대한 견해차이로 교회가 분열되었다는 지금까지의 주장을 무색케 하는 일이 아닐 수 없다. 공예배 중에 회개하는 정도의 자숙방법 문제 때문에 교회가 분열되는 결과를 빚었다고 말한다는 것은 어색하기 짝이 없다. 총로회의 자숙안은 오히려 회개와 자숙의 문제가 교회를 분열시키는 결정적 이유가 될 수 없었음을 입증하는 증거가 되는 셈이라고 할 수 있다.

        경남노회 단 하나만으로 시작된 고신 총로회는 이듬해인 53년에 경북노회 설립을 필두로 56년까지 6개의 노회로 확대되었고, 1956년 9월 20일 대한예수교 장로회 총회가 정식으로 조직되기에 이르렀다. 1946년부터 시작된 고신의 굼틀거림은 1956년에 정상적인 총회체제를 확립하였던 것이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1952년 총로회 조직으로 예장 고신교회가 시작되었고 십년 후인 1956년에 총회라는 이름에 걸 맞는 교회로 자라났다.

고신 설립 기산(起算)의 문제

그런데 이렇게 세워져온 고신교회가 역사를 정리해 가면서 한 가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일을 일으켜 후대를 당혹스럽게 하고 있다. 사연은 이렇다.

        1977년 8월 15-19일, 부산 송도의 고신대학에서 고신 교단 설립 30주년 기념대회가 열렸다. 이를 역산(逆算)하면 고신은 흔히 알고 있는 것과 같이 1952년이 아니라 1947년에 설립되었다고 말해야 한다. 어떻게 된 일일까?

        고신교회가 세워진지 30년이 되는 해에 내용 있는 기념대회를 열려면 논리적으로 29년이 되는 해에 총회적으로 준비 위원회를 구성해야 한다. 아니면 적어도 대회를 가진다는 계획이라도 입안되고 그에 따른 예산이 마련되어야 하는 것이 상식이다. 그러나 1976년 총회에서는 전혀 그런 논의가 일어나지 않았다11). 그런데, 어찌된 영문인지 1977년 제27회 총회가 열리기 직전인 8월 15일에 30주년 기념대성회가 열린 것이다. 얼핏 보아도 정상적이지 못함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짧게 기록된 27회 총회회록은 예상대로 당시 이 문제로 인하여 논란이 발생하였음을 분명히 해 주고 있다. 27회 총회 3일째인 1977년 9월 15일 오전, 교육부의 보고 내용이 다음과 같이 기록되고 있다.

“교회교육부 임시보고 중 교단 30주년 기념집회의 준비와 진행에 미흡했던 점에 대하여 교육부가 본회 앞에 사과하니 받기로 가결하고....교단 30주년 기산 문제는 별도 안건으로 취급하기로 하고 기타는 받기로 가결하니 별지와 같다.”12)

        당시에 지적되었던 미흡한 일이 무엇이었는지는 분명하게 기록에 남아있지 않아 알 수 없지만, 30주년 기념대회 문제로 논란이 있었던 것은 확실해 보인다. 교육부장이 사과까지 하였다는 것은 특정한 사안에 명확한 문제가 있었음을 말해준다. 그러나 여기서 지적된 미흡함의 실체가 30주년의 기산문제와 관련된 것으로는 보이지 않는다. 왜냐하면 기산과 관련된 문제는 후에 따로 다루기로 하였고, 후에 실제로 그 문제를 다루었으며, 총회는 교육부의 설명을 이의 없이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필자가 여기서 관심을 갖는 것은 교단 30주년 기산문제에 관한 것이다. 앞서 지적한 대로 고신교단 설립 30주년 기념대회를 1977년에 열었다는 것은 교단의 설립 기산점을 1947년에 두고 있다는 말이 된다. 그렇다면 이것은 어떤 역사적 사실을 근거로 한 것이었는가? 당시 27회 총회를 향하여 진주노회(노회장 최연석 목사)는 다음과 같은 질문을 제기했다.

“교단 창립 30주년을 어디서부터 기산함이 정확한지요?”

하필 진주노회가 무슨 연유로 이런 간단한 질문을 제기한 것일까? 진주노회 40년사는 동(同)노회가 1977년 9월 6-8일까지 열린 제44회 정기노회(진주 삼일교회당)에서 총회에 건의문을 제출하기로 하고 건의문 작성위원 5인(이금도 이금조 김성택 최연석 김도준)을 선정하였다는 사실만 짤막하게 기록하고 있다13). 그 위원회가 작성한 질문이 바로 위의 내용이었던 것이다. 특별위원까지 선출하여 제출한 질문치고는 너무 싱거운 내용이 아닐 수 없다. 이 정도의 질문을 위하여 특별위원까지 내지는 않았을 것이다. 질문에 포함할 수 없는 그 어떤 내용이 있었을 것으로 짐작되지만 필자의 궁금증을 풀어 줄 방법은 남아있지 않는 상황이다14).

위 질문에 대한 교육부(부장 박치덕 목사)의 대답은 이러했다.

본 교단이 1946년 5월 신학강좌가 개강되고 동년 9월에 역사적인 고려신학교가 개교 되었으며 동년 12월 3일에 진주에서 열린 경남노회에 한상동 목사가 노회의 불법사에 항거하다가 여의치 않아 마침내 탈퇴 선언을 하자 여지(여러?)교회가 여기 호응하게 되었습니다. 이 때 이미 우리 고신 교단이 한국교계에 첫 발을 딛게 된 것으로 우리 고신교단은 1946년 12월 3일을 창립 시일로 보는 것이 옳은 줄 압니다.15)

총회 교육부(부장 박치덕, 서기 이 선)의 이 설명을 총회 본회는 그대로 받아들였고, 이 교육부의 보고에는 보고를 받은 총회가 내린 결정사항이 덧붙여져 있다.

진주노회장 최연석 목사가 문의한 교단 창립 30주년 기산은 한상동 목사가 경남노회를 탈퇴 선언하고 67교회가 호응한 때가 창립정신의 기준이 되므로 1946년 12월 3일을 교단 창립 기산일로 하도록 가결하다.16)

한상동 목사의 탈퇴 선언만으로 교단이 창립되는 것이 부자연스러웠든지 교육부의 보고서에 누군가가 67개교회가 호응한 사실을 덧붙여 가결되도록 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 제27회 총회는 1946년 12월 3일이 고신의 출발시점으로 선언하였고, 이 사실은 고신교단의 정사(正史)의 일부가 되었다. 아직까지 27회 총회의 결정에 대해 공식적으로 이의를 제기한 적이 없으므로 여전히 정사로 남아있다고 할 수 있다. 그와 함께 이 결정은 1977년 8월에 열린 교단 설립 30주년 행사는 1947년이 아니라 한 해 전인 1946년을 기산점으로 삼았음을 밝혀주고 있다.

        이러한 역사 이해는, 알고 보면, 가히 혁명적 발상이요 결론이라고 할 수 있다. 지금까지 고신의 역사를 기록한 그 어느 곳에도 이와 같은 주장을 언급한 곳도, 유사한 주장을 편 사람도 없다. 남영환, 심군식, 이상규, 허순길 등 그동안 교단 역사에 관해 필을 든 사람들이 적지 않았지만 그 누구도 1946년 12월 3일을 고신의 출발점으로 제안한 경우는 없다. 27회 총회 이전에도 없었고, 이후에도 나타나지 않은 이런 주장이 어떻게 당시에는 총회에서 공적으로 받아들여 질 수 있었던 것일까? 우선 1946년 12월 3일에 구체적으로 무슨 일이 있었는지부터 살펴보기로 하자.

역사 속의 1946년 12월 3일

해방이후 경남지방에서의 교회 재건 노력은 위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논란을 빚으면서도 계속적으로 시도되었다. 그 과정을 알기 쉽게 정리하면 다름과 같다.

        ->1945년 9월 2일, 경남지역 ‘신앙부흥운동 준비위원회’ 조직. 선언문 발표
        ->1945년 9월 18일, 경남 재건노회 조직. 자숙안 결의
        ->1945년 12월 3일, 경남노회 제47회 정기노회(마산 문창교회당). 주남선목사 노회장 피선. 자숙 실행 조건 제시
        ->1946년 7월 9일, 임시노회(진해읍교회당). 주남선 목사 노회장 수락. 한상동 목사 남하 후 노회 참석, 신학교설립 의사 표명하자 노회적으로 환영
        ->1946년 9월 20일, 고려신학교 시작.
        ->1946년 12월 3일, 경남노회 제48회 정기노회(진주 봉래동교회당). 김길창 목사 노회장 당선. 신사참배에 대한 입장선회. 한상동 목사 탈퇴 선언.
        ->1947년 1월 3일, 초량 문창 부산진 거창읍 영도 남해읍교회 등 6개교회, 한상동 목사 지지 연합성명서 발표에 이은 67개 교회 지지성명서. 이후 신도대회 이어짐.
        ->1947년 3월 10일 임시노회(구포교회당) 개최. 김길창을 비롯한 임원진 총사퇴. 일본기독교조선교단 시대의 잘못 재차 인정.
        ->1947년 3월 24일, 68개교회 평신도 대표자 모임(회장 황철도전도사)에서 경남노회 교권주의들의 태도 규탄.
        ->1947년 12월 9일, 경남노회 제49회 정기노회(부산 광복교회당). 노회자숙한 불복종 목사들의 사과서 제출 결의. 한상동 목사 탈퇴선언 취소.
        ->1947년 10월 14일 박형룡 박사 고려신학교 교장 취임
        ->1948년 4월, 박형룡 박사 고려신학교 교장직 사임, 서울로 상경.
        ->1948년 7월, 반고려파 ‘고려신학교와 소위 신성파에 대하여’라는 고신 비방 성명서 발표
        ->1948년 9월 21일, 경남노회 제49회 임시노회(항서교회당) 고려신학교 인가취소
        ->1948년 12월 7일, 제50회 경남노회(마산 문창교회 별관) 고려신학교 인가취소결정 재확인. 신사참배 문제에 대한 논란 재연
        ->1949년 2월 19일, 김길창 일파 별도의 경남노회 설립 통보
        ->1949년 3월 7일, 제51회 경남노회(마산 문창교회당)
        ->1949년 3월 8일, 부산 항서교회당에서 김길창 중심의 경남노회 조직. 경남노회 분열시작

위의 사실에서 살펴볼 수 있는 대로 경남노회는 해방 이후 수년 동안 신사참배 참여자들과 반대자들 사이에 날카로운 신경전에 계속 휘말렸고, 노회 리더십의 변화에 따라 신사참배와 자숙에 대한 태도가 오락가락하였음을 볼 수 있다. 결국 1949년 초에 이르러 김길창은 정치적 운동을 통해 노회장이 되었지만, 신사참배 문제에 관한한 자기 의도대로 끌고 갈 수 없다는 판단을 하고서는 노회의 분열을 획책하기에 이른 것이다.

        이런 역사적 흐름 가운데서 1946년 12월 3일은 해방이후 노회를 재건하는 일에 보조를 맞추던 한상동 목사가 전격적으로 경남노회 탈퇴를 선언한 날로 기억되고 있는 가운데 1977년에 열린 27회 고신 총회는 이 날을 고신교단이 출발한 날로 보아야 한다는 대담한 결정을 내린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결정은 몇 가지 점에서 문제를 야기한다. 첫째, 만약 한상동 목사가 탈퇴 선언한 날을 고신의 출발로 보게 되면 지금까지 ‘고신은 총회의 일원이 되려고 노력하였으나 총회로부터 축출되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교단을 설립하였다’고 주장해 온 근거를 상실하게 된다. 총회가 아니라 출옥성도들과 고려신학교 지지자들이 교회의 분리를 먼저 시도하였다는 결론을 얻게 된다. 고려파가 분리주의자가 되는 셈이다.

        둘째, 탈퇴 선언을 했던 한상동 목사는 일 년 뒤에 그 선언을 취소하게 되는데, 그렇다면 고신은 이 때 처음으로 분리된 교회와 합동을 한 셈이 된다. 과연 그렇게 말할 수 있겠는가?

        셋째, 교회가 설립되었다고 하려면 상식적으로 최소한의 독립적 치리회 조직이 갖추어져야 한다. 그러나 한상동 목사의 선언 후에 그런 일이 일어난 징후가 전혀 없다. 물론 68개 교회의 평신도들이 평신도대회를 열어 지지선언을 했지만 여전히 1946년 12월 3일 이후에도 경남노회는 단일노회를 유지하고 있었다.

        따라서 1946년 12월 3일을 교단 창립 기념일로 볼 수 있는 근거를 찾기는 거의 불가능한 일이다. 실제로 27회 총회에서 이런 결정을 한 이후에도 고신의 출발을 이 날로 간주하는 경우를 볼 수가 없다. 이런 사정은 당시 총회의 결정사항을 가장 잘 알 수 있는 인사들에게 확인해 본 결과에서도 나타나고 있다17). 그 누구도 무슨 영문으로 30주년 행사가 77년도에 열렸으며, 누가 주도하여 총회 설립 기산일을 1946년 12월 3일로 보게 되었는지를 기억해내지 못하였다. 지금보다 훨씬 교단이 설립된 시점과 가까운 시대에 살았고, 설립당시부터 함께 한 분들이 더 많았던 77년에, 어떻게 이런 결정이 이루어진 것일까? 진주노회처럼 극히 일부에서만 의문을 가졌고, 그것도 교육부의 설명에 더 이상 의문을 제기하지 않은 상황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 것인가?

그렇다면 30주년 행사는 어떻게 시작되었을까? 제27회 총회록은 총회 기산점을 다룬 교육부 보고에서 또 다른 질문을 다루고 있다. 역시 진주노회장 이름으로 제기된 질문은 교단 기념성회를 거행한 데 대한 경위를 해명해 달라는 것이었다. 이에 대한 교육부이 대답은 30주년 기념대회가 어떻게 이루어졌는지를 그런대로 잘 보여주고 있다.

수난성도 기념 사업회에서 광복 32주년 기념 대성회를 갖기로 하고 추진 중 그 때 마침 총회 교육부가 전국 목사 장로 하기 수련회를 계획 준비하였던 차였으므로 연합하여 대 집회를 갖는 것이 좋은 줄 알고 총회 운영위원회에 건의하였던 바 1977년 6월 27일 총회 운영위원회가 모여 이를 인준하게 되어 지난 77년 8월 15일-19일까지 어려운 일이 없지 않았으나 하나님의 권고하심과 전국교회의 호응으로 본 교단 창립 30주년 기념대성회가 대 성황리에 모이게 되었습니다.18)

위의 교육부 보고는 교단 창립 30주년 기념대회가 놀랍게도 전혀 사전에 준비되지 않은 채 진행되었음을 보여준다. 짐작컨대 두 개의 기관이 각기 다른 집회를 준비하던 중에 중복되는 행사에 대한 염려가 생겨났고, 두 기관 모두 준비가 여의치 않자 연합하여 집회를 가지는 것이 좋겠다는 합의를 하게 된 것으로 보인다. 그와 함께 대회를 불과 두 달 앞 둔 상황에서 총회 운영위원회의 허락을 얻어내어 총회의 공식기관인 교육부가 주관하고 수난성도기념사업회가 후원하는 형태로 대회가 진행된 것 같다. 그러니까 애당초 30주년 대회는 전혀 계획에 없었는데, 종류가 다른 두 대회를 준비하는 과정에 어쩌다 둘을 하나로 통합할 명분으로 30주년이 떠올랐고, 46년 12월을 기산점으로 삼으면 이미 해를 넘겼지만 총회 이전이면 명분이 된다고 보고대회를 치룬 것으로 짐작 된다19).

        그러나 그와 같은 기산점 계산이 전혀 설득력이 없는 것이라는 사실은 30주년 기념대회 이후에 열린 다른 기념대회를 보면 금방 알 수 있다. 30주년 기산이 설득력을 가졌다면 50주년 기념행사는 당연히 1996년에 열렸어야 한다. 그러나 1996년이나 1997년에는 그 누구도 교단 창립 기념에 관한 이야기를 입에 올리지 않았다. 27회 총회를 주도하던 분들 중 여러분들이 생존해 있었지만 그 누구도 50주년 행사를 77년에 이어 97년에 치러야 한다는 의견을 제시하지 않았다. 교단설립 50주년 기념행사는 2002년 9월 총회 때에 열렸다. 이를 위하여 2001년 51회 총회에서 준비 위원회 구성을 결의하기도 하였다.

        50주년 행사를 2002년에 열었다는 것은 교단 창립 기산일을 1952년으로 보았음을 의미한다. 이것이 사실상 고신의 공식 입장이다. 고신 총회는 현재 1952년 9월 11일 총로회를 조직한 것을 교단 창립의 해로, 1956년 9월 20일 총회를 조직한 날을 창립기념일로 삼고 있다. 1976년 12월 3일을 고신 교단 설립의 기산일로 잡은 27회 총회의 결정은 여전히 무효화되지 않고 남아있는 것이 사실이지만, 2002년에 50주년 대회를 여는 것으로 사실상 30주년 행사는 오산에 의하여 일어난 실수임을 스스로 인정한 셈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30주년 기념대회를 1977년에 열고 총회는 그것을 역사적으로 뒷받침하는 결정을 내린 사실은, 아직까지 수정한 흔적이 없다. 교회 분열과 관련하여 엄청난 의미를 내포할 수 있는 역사적 실수를 아무런 반성도 없이 그냥 그대로 담고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20).

역사적 교훈

        고신은 한국교회의 부끄러운 역사를 반성하는 가운데 이루어진 교단이다. 그 어느 교단보다 역사에 깊은 관심을 기울여야 할 이유를 가지고 있다. 역사에 관심을 가진다는 것은 물론 역사에서 얻은 교훈을 오늘에 잘 살려내는 것을 말한다. 그와 함께 역사를 제대로 기술하여 역사적 과오를 되풀이 하지 않도록 노력하는 것을 의미할 수도 있을 것이다.

        고신교단이 30주년 기념대회를 열면서 그 기산점 산정에 문제를 드러낸 것에서 필자는 몇 가지 교훈을 발견하게 된다.

        1. 한국교회 역사의 산물인 고신이, 장로교 최초로 분리된 교회를 설립하게 되었음에도 설립의 근거와 자신의 정체성에 대하여 정확하게 인식하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 아닌가 하는 느낌을 갖게 된다. 무엇보다 바리새파로 불리며, 나쁜 의미에서의 분리주의자로 인식되는 일이 흔하던 상황에서 한상동 목사 개인의 탈퇴 선언일을 교단의 기산점으로 삼았다는 것은 대단히 위험스러운 일로, 당시 지도자들의 역사인식에 심각한 문제가 있었음을 보여준다.

        2. 이 사건은 한국교회의 역사를 반성하며 시작된 고신교회가 구체적인 역사에 매우 무관심하거나 무지함을 드러내었다. 교단의 정사를 집필하기 위한 노력은 1965년 9월의 15회 총회에서 ‘교회사 편찬위원’(송상석, 오병세, 김응도목사)을 선정하는 것으로 교단 역사가 시작된 지 20여년 만에 나타났다. 그러나 실제적인 진전은 없었고, 그러다가 1967년 9월의 제17회 총회에서 총회 역사편찬을 하기로 재차 결정하고 위원을 선정하였다(송상석, 오병세, 정홍석목사). 이 역시 상임이 아닌 임시위원으로 열매를 얻지 못하였다. 그 후 1981년 9월에 열린 제31회 총회에서 한국기독교100주년을 계기로 교단 역사를 편찬하기로 하고 위원 5인(오병세, 심군식, 남영환, 최해일, 신현국)을 선정하여 작업을 맡겼고, 82년 ‘한국장로교(고신) 교회약사’를 출판하였으며, 1988년에야 세차례의 시도 끝에 1972년까지의 역사를 처음으로 출판하게 되었다21). 그러니까 1977년이 고신교회가 설립된 지 30년이 되었다고 보면서도 제대로 된 역사를 편찬할 시도조차 하지 않았다는 것은 30주년을 기념하는 의미가 무엇인지를 별로 생각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3. 설립일 기산의 착오는 총회 조직에 전문가 그룹이 전혀 영향을 끼치지 못하였음을 드러낸다. 물론 이것은 당시까지 교회역사에 관심을 가진 전문가가 전무하였던 현실과 무관하지 않아 보인다. 80년대에도 신학대학원에는 교회사를 전공한 교수가 존재하지 않았던 사실에서 보는 대로, 고신은 역사의 기록이나 평가에 조직적인 관심을 가지지 못한 한계를 여실히 드러내었다.

        4. 오해를 살 위험이 있지만 한 가지 더 지적한다면 고신교회에는 설립초기부터 상당기간 한상동 목사가 차지한 자리가 너무 컸었다는 느낌을 받게 된다. 총회 창립 기산 문제를 통하여서도 이런 사실을 짐작할 수 있다. 고신 교회는 그의 움직임을 매우 중시하였으므로 그의 탈퇴발언에 교회전체가 즉각 반응하고 그것이 공교회의 기산점이 되는 모습까지 보인 것 아닌가 한다. 1960년 승동 측과 합동한 이후 3년 만에 다시 고려신학교를 복교하는 과정 역시 그랬다. 한상동 목사 개인의 결정이 곧 공교회의 결정으로 받아들여질 정도였다. 1977년에는 이미 한상동 목사가 세상을 떠났지만 여전히 그런 흐름 속에 있었던 것이 아닌가 싶다. 한상동 목사를 너무 중요시하다보니 그의 탈퇴선언이 곧 교단창립으로 받아들여지기까지 한 것이 아닌지 모를 일이다.

        공교회로서의 정체성을 확립하는 것은 지금도 커다란 과제로 남아있다. 지금도 수많은 결의안들이 사실은 몇몇 사람의 주장에 따라 쉽게 총회의 결정으로 둔갑되고 있다. 그 총회의 결정이 이전의 결정과 어떤 모순이 있는 것인지, 총회가 결정을 할 수 있는 성격의 사안인지, 역사적으로 어떤 의미를 가지는 것인지도 알아보지 않은 채, 적당히 결정되는 상황을 바꿀 길이 잘 보이지 않는다. 총회 창립 기산에 관한 27회 총회의 결정도 지금까지 밝혀지지는 않았지만 어떤 개인의 주장이 영향을 끼친 것이라는 의혹이 있지만 과연 누가,혹은 어떤 그룹의 사람들이 그런 주장을 하였는지 현재까지는 밝힐 수 있는 방법이 없는 상황이다22).

결론

        필자는 총회 설립일 기산점에 관한 조사를 통하여 공교회가 의외로 허술한 면을 가지고 있음을 확인하게 된다. 총회는 매번 회의를 열 때마다 수많은 결정을 하지만 그런 결정이 얼마나 실제로 집행되고 있는지 알 길이 없다. 기록을 담당하는 자들이 잊어버리면 그 누구도 기억해 낼 수 없다. 필자는 수년전 한국교회 선교초기에 제정된 학습제도를 재고해야 한다는 의견을 소속 중부산 노회를 통하여 제기한 적이 있다. 그러나 ‘연구해 보기로’ 결정한 그 문제는 아무런 조치 없이 사라져 버렸다. 1977년 제27회 총회는 ‘사도신경을 고백하는 교회와는 연합집회를 할 수 있다’고 결정하였지만 2004년 총회는 ‘사도신경을 고백하는 교회와 연합할 수 있다’고 주장한 사람을 자유주의자로 규정해 버렸다. 앞뒤가 맞지 않는 결정을 하여도 아무런 문제가 없다. 사학법, 국가보안법 등 소위 4대 악법이 문제가 될 때 신앙고백서 31조가 명백하게 금지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국가의 일에 교회가 관여하는 결의안을 통과시키는 우를 범하기도 하였다.

        고신교회는 공교회로서 개인과 소수에 의해 좌우되는 교회가 아니라 성경과 양심, 신학과 역사에 따라 이어져온 원리를 따라 살아가는 교회로서의 모습을 보여야 한다. 이 일은 전적으로 교회 지도자들의 몫일 수밖에 없다. 이 과정에서 진지한 연구와 활발한 토론이 이루어지고, 기본에 충실한 사람들이 많이 나타나야 할 것이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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