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기고글] 제2의 축복은 있는가? - 박영돈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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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의 축복은 있는가?
선지동산 47호 게재 / 성화의 복음(7) / 박영돈 교수
내게 찾아온 뜻밖의 은혜
스티브 맥베이 목사는 그가 쓴 베스트셀러 『내게 찾아오시는 하나님의 은혜』에서 그의 삶과 사역을 획기적으로 변화시킨 은혜체험을 소개하였다. 그는 매우 성공적인 목회를 해왔으며 장래가 촉망된 젊은 목사로 인정받아왔다. 새로운 교회로 청빙 받아온 그는 자신감과 의욕에 넘쳐 교회를 부흥시키려고 열심히 뛰었다. 그러나 전과 같이 교회가 성장하리라는 기대와는 달리 교회는 오히려 쇠퇴해 갔고 교인 수는 점점 줄어만 갔다. 그는 17년 동안의 목회생활 가운데 최악의 상황을 맞이하면서 처음으로 실패의 압박감으로 질식할 것 같았다. 지혜는 막다른 길에 도달했고 그의 몸과 마음은 지칠 대로 지쳐 더 이상 버틸 수 없을 정도로 비참한 지경에 이르렀다. 그는 어느 날 완전한 실의와 절망에 빠져 흐느껴 울며 이렇게 기도했다. “주님, 이 종은 삶에서 승리하려고 노력하다가 지쳤고, 목회에서 성공하려는 열심에도 지쳐 있습니다.” 그러면서 그는 지금까지 자신이 중요하다고 생각했던 모든 것 - 목회성공, 명성과 인정 등 - 을 내려놓기로 결심했다. 그리고 그날 밤 그는 그의 삶과 사역에 획기적인 전환점이 되는 은혜를 체험했고, 그것을 이렇게 기록하였다. “오늘 자정과 새벽 2시 사이 하나님의 성령이 내 마음에 임하시어 나를 사로잡으셔서 구속의 일을 행하셨다. 자세한 내용을 기록하기엔 너무 개인적이고 신령한 것이지만, 내게는 과거 18년 동안 일어났던 그 어떤 것과도 비교할 수 없는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소중한 체험이었다.” 이 체험 이후 그의 삶은 결코 전과 같지 않았다. 실패의 삶에서 승리의 삶으로, 곤고하고 비참한 삶에서 풍성한 삶으로 전환하였다. 그리고 다시는 옛 생활로 돌이키는 일은 없었다.
맥베이는 자신이 새롭게 발견한 그리스도 안에서 안식하는 삶으로 독자들을 초청한다. “그리스도를 위해 살려고 노력하지 말라” “당신이 그렇게 살려고 노력하면 할수록 당신은 반드시 실패할 것이다. 그런 노력은 항상 좌절과 실패를 가져온다.… 하나님은 결코 그리스도인의 삶이 투쟁이 되도록 의도하지 않으셨다. 호흡하는 것과 같이 자연스럽게 그리스도인의 삶으로부터 성령이 흘려 나와야만 한다.… 하나님께서는 결코 당신에게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도록 의도하지 않았다. 그분이 당신을 통해 일하시도록 당신이 허용한다면, 그분은 당신을 통해 자신의 삶을 사실 것이다! 많은 현대교회의 교인들은 하나님을 섬기기 위해 노력하다가 완전히 지쳐있다.” 얼마나 기쁜 소식인가! 성화의 과정에서 지쳐있는 영혼들에게 금세라도 새로운 돌파구가 확 열릴 것 같은 희망을 안겨주는 메시지이다. 바로 그 점이 많은 독자들을 끄는 마력이다. 동시에 그것이 함정이 될 수도 있다. 이런 메시지는 결코 새로운 것이 아니라 오래 전부터 유행하던 ‘제2의 축복’성화론의 리허설이다.
제2의 축복에 대한 가르침
과연 신자의 삶과 사역을 획기적으로 변화시키는 성화의 은혜는 존재하는가? 웨슬리는 이러한 은혜가 있다고 보았다. 웨슬리는 이를 즉각적, 또는 온전한 성화(Instantaneous sanctification, or Entire sanctification)라고 칭했다. 이 은혜를 체험하면서부터 하나님의 사랑 안에 온전해지며 그리스도로 충만한 삶을 살게 된다는 것이다.
웨슬리와 성결운동에 이어 일어난 ‘더 풍성한 삶 운동’(Higher-life, or Deeper-life movement)과 유명한 케직 사경회(Keswick movement)에서는 이 획기적인 성화의 은혜를 자주 제 2의 축복(second blessing)이라고 불렀다. 케직 사경회를 주도했던 에프 비 마이어(F. B. Meyer), 앤드류 머레이(Andrew Murray), 알 에이 토레이(R. A. Torray), 그리고 그 가르침을 전파한 디 엘 무디(D. L. Moody), 에이 비 심슨(A. B. Simpson), 에이 제이 고든(A. J. Gordon), 모울(H. C. G. Moule) 같은 이들을 통해서 이러한 성화론은 그동안 수많은 사람들을 매료시켜왔으며 지금도 그들이 남긴 경건서적을 통하여 우리에게 많은 영향을 끼치고 있다.
그들은 이 은혜체험을 “자아가 죽는 체험”, 또는 “롬 7장에서 8장으로 넘어가는 체험”, “육적인 삶에서 영적인 삶으로 전환하는 체험”등으로 묘사하였다. 이 은혜를 받는 순간부터 신자의 삶과 사역은 그 전과는 완전히 달라진다고 본 것이다. 마치 물이 포도주로 변화되듯이, 신자의 삶이 실패와 좌절과 신음으로 점철된 곤고한 삶에서 능력과 기쁨과 평강이 가득한 승리의 삶으로 급전환된다는 것이다. 간혹 제2의 축복을 ‘성령세례’(baptism in the Holy Spirit) 또는 ‘성령충만’(filling of the Holy Spirit)이라고도 불렀는데 20세기 초부터 성령에 대한 관심이 급증하면서 점차 이러한 명칭은 선호되었다. 이런 배경에서 오순절 교회의 성령세례의 가르침이 등장한 것이다. 본격적으로 오순절 운동이 진행되면서 성령의 이차적 체험을 암시하는 것 같은 사도행전의 본문들은 그들의 견해를 뒷받침하는 성경의 본문으로 사용되기 시작했다. 이런 측면에서 볼 때 오순절 성령세례의 가르침은 20세기에 와서야 등장한 새로운 교리가 아니라 그 역사적인 기원은 웨슬리-성결운동-케직 사경회로 거슬러 올라간다. 웨슬리의 ‘즉각적인 성화’의 가르침, 성결운동과 케직 사경회의 ‘제2의 축복’의 메시지, 그리고 현대 성령운동의 ‘성령세례’의 교리는 세부적인 내용에서는 차이가 있으나 획기적인 제2의 은혜체험을 강조한다는 점에서 서로 맥을 같이 하고 있다.
그러나 신약성경에 의하면 죄와 분리된 성결한 삶은 회심 후 제2의 축복을 체험할 때까지 유보되는 것이 아니라 예수를 처음 믿을 때부터 시작된다. 신자가 믿음으로 그리스도와 연합할 때 죄에 대해 죽고 새사람으로 부활하는 결정적인 성화가 일어나며 동시에 성령으로 인도함을 받는 특권이 주어진다. 따라서 성경이 제시한 정상적인 성화의 삶은 예수를 믿을 때부터 성령으로 충만하여 죄와 결별된 거룩한 삶을 사는 것이다. 현대 교인들의 문제는 바울 사도가 고린도 교인들에게 지적했듯이 그들이 이미 그리스도 안에서 거룩하여지고 새로워진 성령의 사람들(신령한 사람)인데 자신들의 변화된 실제와 본분대로 살지 않고 영적으로 방황하고 있다는 점이다(고전 1:2; 3:1-3).
영적인 조급증
제2의 축복 성화론은 교리적인 면뿐만이 아니라 실천적인 면에서 여러 가지 문제를 야기한다. 많은 경우 극적 은혜를 은근히 바라는 마음은 성화의 긴 여정을 참지 못하는 조급함과 그 지겨움을 피해보려는 심리에서 비롯된다. 우리는 죄와 실패와 좌절이 되풀이되며, 내적 싸움이 끊임없이 계속되는 성화의 점진적인 과정을 견디는데 힘겨워한다. 반면에 이런 죄와 갈등의 문제를 일격에 해결해주고 지겨운 연단의 과정 없이 단숨에 영적 성숙의 단계로 도약하게 해줄 은혜체험을 갈망한다. 우리 안에는 이런 영적횡재를 바라는 요행심이 도사리고 있다. 우리의 영적인 조급증은 자주 은혜에 대한 열정으로 가장된다. 우리는 하룻밤사이에 거룩해지고 은혜가 충만해지며 수십 년 동안 형성되어 온 죄의 습관을 단숨에 제거해달라고 과도한 요청을 하곤 한다. 그러나 이것은 거룩함을 간절히 추구하는 것 같지만 사실은 우리 자신이 스스로 초래한 죄의 결과에 대해 하나님을 비난하는 태도와 별다름이 없다. 한 번의 획기적인 순종과 헌신으로 우리의 죄와 실패가 결코 끝장나는 것은 아니다. 그 어떤 은혜체험도 과거의 죄와 완전히 결별된 삶을 살게 하지 못한다. 그러므로 큰 은혜를 받은 후 자신의 삶이 다시는 전과 같지 않다는 간증은 자칫 잘못하면 듣는 이들에게 비현실적이고 그릇된 기대감을 심어줄 수 있다.
맥베이 목사와 그와 같은 은혜체험을 했다는 이들의 증언을 평가절하 할 필요는 없다. 그들은 귀한 은혜를 체험한 것이며, 또한 그런 식의 극적인 변화는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이 모든 교인들이 체험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사실 그런 은혜를 체험한 이들은 극소수에 불과하다. 소수의 선택된 이들만 자신들에게 하사된 특별한 은총을 자랑할 수 있는 특권을 누린다. 나머지 무수히 많은 유기된 자들- 그런 특혜의 대상이 되지 못한 자들은 할 말을 잃고 있을 뿐이다. 그러니 성공사례만이 알려진 것이다. 사람들은 그것이 실현 불가능한 것일지라도 극적인 성공담을 듣기 원하지 실패한 자의 밋밋한 경험담을 들으려고 하지는 않는다. 맥베이 목사가 처했던 것과 똑같이 절박하고 비참한 상황에서 그런 은혜를 간절히 구했던 수많은 사람들은 그것을 끝내 경험하지 못했다. 맥베이 목사가 깨달았던 성화의 비밀을 다 알고 그대로 실천했음에도 불구하고 아무리 구해도 그런 은혜를 맛보지 못했다. 이것이 제임스 패커(J. I. Packer)같은 이들이 겪었던 당혹스러운 경험이었다. 패커는 이런 가르침을 따라 자기를 비우려는 수년에 걸친 처절한 몸부림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소위 누리고 있다고 주장하는 승리의 삶이란 점점 더 자신에게 요원한 것이라는 것만을 절감하게 되었다고 고백했다.
그러므로 이런 메시지가 교인들에게 희망과 위로를 줄 수 있는 반면에 교인들을 실의와 혼란에 빠지게 할 수도 있다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상한 감정의 치유』를 쓴 데이빗 씨맨즈는 이러한 가르침이 내적치유의 과정에 심각한 폐해를 끼친다는 점을 지적하였다. “우리는 빠른 치료에 대한 모든 생각을 버려야 한다. 극적인 치료를 받으면 순식간에 고칠 수 있다는 말에 현혹되지 말라 실제로 빠른 해결책을 찾는 것 자체가 이 병의 일부분이 될 수 있다.” 마찬가지로 심리학자이며 복음 전도자인 존 화이트(John White)도 이런 가르침에 주의하라고 당부한다. “성화나 승리의 ‘단순한 비밀’을 가르쳐 주려는 책이나 가르침을 경계해야 한다. (성화)과정에 그런 비밀이란 없다. 그런 책이 혹 어떤 유익을 줄 수도 있다. 그러나 어떠한 믿음도, 포기하고 하나님이 일하게 하는 것(Letting go and letting God)도 당신 안에 거룩하게 하는 과정을 시작하게 할 수 없다. 어떤 비밀도 그 과정을 하룻밤사이에 끝내게 할 수 없다.”
발췌본문: 많은 경우 극적 은혜를 은근히 바라는 마음은 성화의 긴 여정을 참지 못하는 영적인 조급함에서 비롯된다.
(다음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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